특집

[특집: 2025대선 ③]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32인의 외침!”

CP_NET 2025. 5. 13. 13:48

 

편집자 주: 긴 탄핵정국이 끝나자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곧 각 정당의 후보자들의 선거 유세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선거는 후보자들의 경합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선거는 정치적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며, 후보자들은 마땅히 그러한 요구들을 속에서 경합해야 합니다.

[문화정책리뷰]는 제21대 대통령선거를 맞이하여 특집:2025대선을 마련했습니다. 후보자들의 약속에 갇히지 않고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의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프롤로그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20인의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프롤로그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20인의 외침!”
잊혀진 문화헌장을 다시 들추며 (염신규)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32인의 외침!”
[2025예술인선언]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의 삶과 예술을 위한 사회를

 

 

“생활 속의 예술, 예술하는 생활”

고정순_ 그림책 작가

나는 밤마다 북한대남방송이 들리는 접경 지역 파주에 살며 그림책과 산문집을 쓰는 작가다. 서울살이를 마무리하고 파주에서 이삿짐을 부린 후 가장 먼저 한 일이 걸어서 갈 수 있는 곳에 있는 작은 도서관을 찾는 일이었다. 그림과 글을 동시에 작업하는 내 직업의 특징을 살려 마을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지역주민들과 도서관 식구들의 도움으로 3년째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 ‘문학의 밤’과 같은 행사를 하면서 지낸다. 외지인이라는 인식 탓인지, 나의 공부(?)가 부족한 탓인지 정책 지원사업은 여전히 접근하기 어렵다. 개인적인 즐거움으로 시작했던 지역주민들과의 글쓰기도 어쩌면 정서적 교류를 바탕으로 한 연대를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문화정책에 관한 사견을 말한다면, 나는 가장 비현실적인 답을 내놓을 수밖에 없다. 지원사업에 존재하는 일정한 틀이 작가의 상상력과 즐거움은 이야기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접경 지역인 연천에서 어르신들과 글쓰기와 그림 그리기를 함께 했다. 인삼밭 한가운데 모여 서로 수다를 떨며 그림을 그리고 글을 쓰는 시간 동안,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공간과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기뻐했다. 생활 속 예술은 예술하는 생활이 있어야만 실현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영화 <패터슨>에서 시를 쓰는 버스 기사는 코인 세탁소에서 음악 작업을 하는 랩퍼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작가가 즐겁게 상상할 수 있도록 문화 예술 정책도 이제는 규칙이나 틀을 조금은 깨고 나왔으면 좋겠다.

 

 

“20세기 문화정책과의 이별”

권상구_ 시간과공간연구소 상임이사

2025년, 이제 21세기가 왔다. 2024년 12월 3일 한국사회의 시간을 뒤로 가게 했던 거대한 사건이 있었다. 세상을 바꾸는 것은 거대한 사건이며, 이로 인해 새로운 인식이 출발한다는 화이트헤드의 말을 다시금 되새긴다. 이 사건은 우리사회가 살고 있는 시간대가 어디인지에 대한 큰 통찰을 주었다.

한국의 21세기는 여전히 20세기와 구별되지 못했다. 뒷방 늙은이들의 대한민국은 여전히 같은 얼굴이었으나, 광장에 나온 시민들은 얼굴이 바뀌어 있었다. 숨어있던 20세기들이 소환되었고 질문받았다. 시민 모두가 뉴스를 만들었고 재판관이 되었다. 이 시기 숨가쁘게 새로운 문화들이 탄생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배타적이면서도 긍정적인, 개인적이면서도 집단화되는 사회의 경계 짓기,, 구별하기, 차이만들기 행동들이 폭발적으로 이뤄진 시간이었다.

문화는 경계짓기다
문화는 언제나 사물과 사물을 구분하는 경계선이 어디에 그어져야 하는가를 규정해 왔다.. 그 경계선은 자의적임에도 불구하고 일단 습득되고 내재화되면 실재하는 것으로 다루어진다.”(에드워드 홀, 문화를 넘어서)

인간의 죽음을 목격한 한 인간이, 삶과 죽음을 경계짓는 실천행위를 한 순간이 문화의 태동이라는 주장이 있다. 나일강 피라미드, 툰드라 풍장, 고분군 순장 등 고대문명 발굴지에서는 죽음은 살아있음과 다르다고 경계짓는 형식이 발견된다. 인류문명의 출발은 이렇게 살아있음과 죽어있음을 경계 지워,, 동물을 객관화한 최초의 동물이었다. 동물의 야만을 객관화하여 야만적이지 않는 동물이 된 것이다.

문화 건너편에 야만이 있다.

인류의 역사는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강자로부터 선하고 평화적인 약자를 구출해 온 역사다. 이러한 야만으로부터 거리를 두는 방법이 바로 문화인 것이다.

야만의 시대는 독점하는 사회다. 이데올로기가 통치이념이 된 20세기다. 표현의 자유와 표현할 능력을 제하는 사회다. 수도에 몰려가 지방을 지배하는 사회다. 밀실의 소수가 광장의 다수를 이기는 카르텔이다. 비주류를 내치는 속 좁은 주류질서다. 사회적 약자의 자리를 비워두지 않는 도시다. 노동자를 수단화하는 경영자들이 있는 곳이다.

문화적 사회는 정의와 부정의 경계가 선명한 곳이다. 누가 가해자이고 피해자인지 분명히 판결하는 재판장이다. 소수 엘리트 가치만 추종하지 않는 다양함이다. 패자에게도 부활의 기회를 주는 플레이그라운드다. 무리 속에서 개인도 잘 보이는 광장이다. 기억할 것과 잊어야 할 것을 잘 구분해 놓은 저장소다. 사건의 재현과 왜곡이 잘 구분되어진 역사책이다. 자동차와 보행자가 각자의 속도로 잘 흘러가는 길이다.

문화는 새로운 사회를 위해 민주적이며 필요한 경계를 만들어가는 인간 행동이다. 나는 너와 다르다로 출발해서 나는 너와 같다로 합의되는 공식하다. 지금 한국사회는 폭발적으로 시민의 경계짓기 행동이 일어나고 있는 순간이며, 바로 이 순간에 문화정책의 21세기를 이야기해야 될 시기이다.

단순 장르지원, 예술가지원, 행사지원에 국한된 20세기 문화정책은 21세기에도 여전히 우리와 함께 하고 있다. 문화는 특정 전공학습도 아니며 기초예술 지원도 아니다. 문화정책은 우리 사회의 새로운 경계를 만들 수 있는 창의적인 시민, 표현력을 가진 시민을 키우는 일이어야 한다. 한 시민의 성장과정에서 야만적이지 않아도 살아갈 수 있는 사회 안전망을 만드는 것이다. 이 영토에서 깃발을 들고 가는 프런티어가 예술이며 예술가이다.

 

 

“나는 이런 대통령을 원한다”

권은비_ 미술가

나는 가난한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집중호우로 인해 반지하에서 일가족이 목숨을 잃은 집을 구경하듯 기웃거리는 대통령이 아니라, 장마 때는 밀려들어오는 물을 집 밖으로 퍼내야 하고 여름엔 폭염에 숨이 막히고, 겨울엔 보일러조차 있지 않은 집에 사는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재난으로 인해 세상에서 소중한 사람을 잃어본 경험이 있는 대통령을 원한다. 재난 참사가 벌어졌을 때 재난현장에서 카메라를 의식하는 대통령이 아니라 누구보다 제일 먼저 피해자와 유가족들을 찾아가 진심 어린 사과를 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국가와 대통령의 최우선 임무는 국민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라는 것을 천명하고 임기가 시작되는 대로 생명안전기본법을 만드는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여성, 성소수자인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가부장-자본주의 사회에서 지속적인 성착취를 온몸으로 경험한 대통령을 원한다. 성폭행을 고발했다는 이유로 권력가들과 언론을 통해 갖은 욕을 먹으면서도 굴하지 않으며, 성폭행 피해자인 친구 또는 동료를 끌어안고 울어본 대통령을 원한다.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성소수자라는 이유만으로 온갖 차별을 밥 먹듯이 당했어도 저항하기를 주저 않으며 차별금지법을 조속히 제정하는 여성, 성 소수자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이주민 대통령을 원한다. 공장에서 일하다가 손가락 하나가 잘렸다는 이유로 치료는커녕 해고를 당하고, 심지어 추방 조치를 당해야 했던 대통령을 원한다. 일하다 죽은 동료의 영정사진을 가슴을 품고 다니는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장애인 대통령을 원한다. 이동권을 요구하며 지하철을 탔다는 이유만으로, 장애인시설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곳에서 살 권리를 요구했다는 이유만으로 너무 많은 것을 원한다라는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들어본 대통령을 원한다. 장애인 전용 엘리베이터에 만원 탑승한 비장애인들 보며 하염없이 엘리베이터를 몇 번이고 그냥 보내 봤던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비인간-생명의 권리를 보장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인간이 만들어낸 착취의 굴레의 최전선에 있는 비인간들의 죽음을 묵과하지 않는 대통령을 원한다. 각종 전염병이 발생될 때마다 대량 폐기 처분되는 동물들의 울음소리를 들어본 대통령을 원한다. 생명다양성을 지키는 것이야말로 이 폐허의 세계를 구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예술가 대통령을 원한다. 나는 가난하고, 재난으로 겪었으며, 여성이며, 성소수자이고, 이주민이며, 장애인인 예술가 대통령을 원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돈과 이익으로 환산하지 않고 무의미하고 쓸모없고 가여운 존재들의 아름다움을 지켜줄 수 있는 예술가 대통령을 원한다. 평등한 사회는 불가능한 유토피아가 아니라 당연한 권리여야 하며 누구나 가져야 할 기본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하는 대통령을 원한다.

* 이 글은 미국의 페미니스트 미술작가 조이 레너드(Zoe Leonard)의 작품 '나는 레즈비언 대통령을 원한다'('I Want a Dyke For President', 1992)를 고쳐쓴 것이다.

 

 

“공공성과 다양성, 광장의 목소리를 들어라”

김성진_ 문화기획자

지난겨울, 탄핵 집회의 광장은 공공의 논의가 이루어지는, 다양성을 확장하고 품어내는 공동체 공간이었다.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한 명 한 명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며, 현실의 민주주의 정치가 작동하는 경험을 나누었다. 이러한 광장의 논의 방식이 시스템적으로 만들어진다면 진정한 민주주의 정치가 만들어지지 않을까. 이제부터 새로운 정권을 만들어 갈 사람들은 탄핵 정국에서 보여준 시민들의 이야기, 광장의 목소리를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또다시 광장은 잊혀지고 꾼들의 권력투쟁만이 되풀이되지 않을까 걱정도 되지만, 광장의 시민들이 만든 새로운 정권은 공공성에 기초한, 다양한 시민의 목소리를 수용하는 공론의 장을 만들어 문화민주주의에 기초한 문화예술정책을 세우기 바란다.

윤석열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기존 정책이 유지해 왔던 공공성 기반의 기조를 흔들고 문화 산업 육성과 경제적 성과 중심의 정책을 시행함으로써 공공적 비전이 사라진퇴행적인 행태를 보였다. ‘문화로 행복한 사회, K-컬처가 이끄는 글로벌 문화강국이라는 문화체육관광부 주요 정책 비전에 이러한 퇴행성이 잘 드러난다돈이 되는 문화산업이건 돈 안 되는 문화예술사업이건 정부의 문화예술정책은 공공성에 기초해야 한다문화예술계에서 이루어진 공공성 논의는 오랫동안 시민 주체의 문화민주주의지역문화예술의 진흥불평등한 구조 개선과 문화다양성 확대 등의 측면에서 지속적으로 논의되어 왔다이러한 공공적 지향이 민주주의를 성숙하게 하고단순한 수치와 자본으로 환원할 수 없는 국민 삶의 질의미 수준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그대들광장의 목소리를 기억하길 바란다

 

 

“우리 지금 만나, 당장 만나”

백교희_서울프린지네트워크 대표

몇 년째 끊임없이 큰 파도가 몰아치는 기분이다. 나는 분명 서핑 초급반이었는데. 어느새 이 큰 파도들을 온몸으로 받아내고 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우리의 생태계는 무사한가? 내 옆의 동료들은 무사한가? 이 생태계 안에 누가 있는가? 남았는가? 떠나갔는가? 우리는 서로에게 동료인가? 내 옆에는 어떤 동료가 자리하고 있는가? 민간예술씬은 어디로 갔는가? 파편화된 채 홀로 둥둥 떠다니고 있는 개인들이 민간이라는 이름으로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소수의 사람들이 이 생태계를 대변하고 있지 않은가? 공공은 이 생태계의 일부인가 아닌가? 우리는 함께 대화하는가? 함께 성장했는가? 분명 수십 개의 ‘양성’ 사업들이 있었는데, 그만큼 양성되었는가? 예술가, 기획자, 행정가, 연구자, 관객, 후원자, 민간/공공조직은 성장했는가? 어떤 방식으로 성장했는가?

지난 20여 년 간 계속해서 확장해 온 우리의 생태계가 현재 어떤 문화예술생태계를 만드는 데 기여했는지, 우리 생태계 구성원 모두 냉정하고 치열하게 들여다볼 때가 되었다. 지금 당장, 나중 말고.

사람과 시간에 돈을 쓰자
.
그래야 하는 이유를 우리 스스로 연구하고, 실천하고, 설득하자.
모이자. 만나자. 대화하자. 서로를 알자. 뻗어나가자.
여러 단위의 구성원들이 모여서, 느리고 다정한 토론을 바탕으로 한 인사, 정책, 결정구조를 만들자. 지금부터 만들자.
새로운 시대에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다시 시작하자.
단기적 예산 확충, 제도 신설만으로는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온 불신과 단절을 만들어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정말로 새로운 미래를 그려야 할 시기에 도달했다. 그동안 미뤄왔다면, 이제 더 이상은 버틸 곳이 없다. 디지털 시대, 기후위기, 노령화, 지역소멸, 양극화, 저성장, 분쟁과 전쟁. 그 무엇 하나 낙관적인 미래를 상상할 수 있는 뉴스가 없다. 그러나 예술은 혁명적이고, 우리에겐 혁명을 시작할 힘이 있다. 우리 스스로 인정하지 않을 뿐.

그래서,
우리지금만나우리 지금 만나, 당장만나!

 

 

“그래서 대구에 살고 있어요”

서민기_ 기획자, 음악인

“대구에 남아 계신 이유가 있으신가요?” 4년 전 즈음, 지역 내 청년예술가를 소개하는 인터뷰 중 마지막으로 받은 질문이다. 나는 대구에 남아 있는 게 아니라 대구에서 살아왔고 여전히 살고 있을 뿐이다. 지역에서 오랜 시간 문화예술을 이야기해 온 매체 편집자의 의도 없는 질문에 잊고 살던 마음속 가시들이 쑤셔왔다. ‘대구’라는 지역이 가진 색깔을 아주 가까이서 마주한 불편한 느낌과 함께 알 수 없는 공허함이 밀려왔다. 

작년 겨울, 대구 시내 동성로에 많은 사람들이 매일 모였다. 추위에 떨며 무대에 올라 연주로 놀라고 화난 마음을 나누었다. 끝을 찾을 수 없이 거리에 앉은 사람들의 눈빛들과 음과 음 사이를 연결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문득 그날의 인터뷰가 생각났다

말해야 할 것들이 많아서, 지키고 싶은 것이 많아서, 그래서 대구에 남아 있어요.

 

 

“너나없이 지워지기 전에 지역생태문화거점을 육성하고 지원하라”

유한주_ 영상활동가, 검산동 찬우물 주민

수도권 접경지대 오래된 동네에 살고 있는 주민으로서 일상에서 펼쳐지는 광경은 그야말로 살풍경(殺風景)이다. 벚꽃 지는 봄날, 마을 뒷길로 광복절 폭주족처럼 몰려다니는 탱크들이 땅을 구르는 소리를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새벽녘 달 밝은 밤, 동네를 가로지르는 개울가 개구리울음 너머, 대남 확성기로 전해지는 귀신들의 아우성엔 그저 마음이 심란할 뿐이다. 정말 애가 타는 광경은 동네 어귀, 엄마처럼 마을을 품어주던 동산 허리춤이 거대한 포크레인 삽날에 깎이는 모습을 보는 것이다. 그 멀쩡했던 동산이 무너지기 전, 몇십 세대를 거쳐 자리를 지키던 나무들이 베이는 날카로운 기계톱 소리를 듣는 것은 정말이지 참기 힘든 고통이었다.

나는 관청에 가서 항의했다. 저 큰 동산이 사라지고 이리도 넓은 창고들이 들어서면 이 동네는 어쩌냐고. 그들은 건강한 생태가 멸절되든, 오래된 동네가 어찌 되든 상관하지 않았다. 시청 주무관은 적법한 허가 절차를 거친 사업임을 강변한다. 누구누구의 친구들이며 여기저기 도사리고 있는 지역 부동산의 개발업자들을 거들어 줄 뿐이다. 시의회에서 만든 지속가능한 도시계획, 생태보전과 기후위기 대응을 위한 조례는 분명히 있다. 행정은 그 조례들을 시행하지 않는 것 또한 분명하다. 철마다 머리 위를 나르던 새들의 무리가 아무리 줄어든다 한들, 매 여름 기온이 최고치를 경신한다 한들, 종말을 이야기하는 과학자들이 아무리 심각하다 경고한들, 수도권 접경지대 오래된 동네에 살고 있는 나의 살풍경은 도무지 변할 것 같지 않다.

이 동네 저 동네 멀쩡하던 동산들은 지금도 여지없이 깎여 나가고 있다. 지구가 망해도 아니 지구는 망하지 않는다. 인간이 망해도 누군들 변명을 할 수 있으랴. 지금이라도 지역의 가치와 생태를 지키는 생명의 이야기를 만들고 실천해야 한다. 이제라도 지역과 생태를 지키려는 사람들의 행동으로 자본이 만드는 강포 한 변화에 대응해야 한다. 이 중요한 일들을 문화정책으로는 담아낼 수 있을까? 그럴 수 있다면 나는 그 정책에 기꺼이 동참하겠다. 지워지는 내 마을을 지키기 위해.

 

 

“거짓말과 개소리”

윤정용_ 영화평론가

폴 토머스 앤더슨의 영화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는 포스트모더니즘 소설을 대표하는 작가 토머스 핀천의 동명의 소설을 바탕으로 한다. 핀천의 소설은 ‘난해함’ 때문에 거의 영화화된 적이 없지만 비교적 “대중친화적”인 이 작품은 영화화되었다. 소설가 정지돈은 핀천의 소설이 거의 영화화되지 않는 이유로 “내용 대부분이 개소리 때문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핀천의 소설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 즉 작품의 난해성, 깊이, 언어의 현란함이나 서사의 모호함은 단지 핑계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대신 그는 핀천을 “아무 근거도 논리도 없는 개소리를 음모론과 편집증의 관점에서 기술 문명의 정신병리학적 증상과 연결시킨, 전무후무한 아무말러”, 즉 “개소리 예술가”로 천명한다. 물론 정지돈은 개소리를 핀천을 비난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의 뛰어난 천재성을 칭찬하기 위해서 긍정적인 맥락으로 사용하고 있다. 

영화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형식과 내용 면에서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필름 누아르의 관습을 따른다. 하지만 핀천 소설 특유의 난해함과 원작을 충실히 재현하려는 앤더슨의 연출이 결합되어 독특한 결과물이 되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은 약을 빤 것 같다는 평을 남겼다. 영화의 배경은 히피 문화가 시들어가던 1970년의 미국이다. 궁지에 빠진 의뢰인은 전 남자친구인 사립탐정에게 사건을 의뢰한다. 궁지에 빠진 의뢰인은 치명적인 아름다움의 소유자, 팜 파탈이다. 하지만 이야기가 진행되면서 영화는 사건의 해결이라는 본래의 목적과 다른 길을 간다. 감독은 당시 시대상을 독특하게 재구성하고 플롯을 복잡하게 함으로써 관객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인히어런트 바이스>이 핀천의 개소리를 충실하게 재현한다. 영화 속 장치와 구조는 전적으로 개소리적이다. 영화 속 인물들은 안과 밖이 어울리지 않는 장소에 갑자기 등장해 터무니없는 고유명사를 던지고 유령처럼 사라진다. 난데없는 정보들은 제시만 되며 플롯에 영향을 주지 않고 설정을 위한 설정, 여담 그 자체로 휘발된다. 무엇보다 <인히어런트 바이스>가 개소리인 이유는 끊임없이 말하면서도 스스로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인히어런트 바이스>는 진실이나 진리가 없다고 주장하는 게 아니라 추리소설의 합리적 이성이 보장하는 방식, 즉 미국 영화가 보여주는 선별적이고 통제적인 방식으로는 그곳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개소리의 형식을 통해 보여준다. 우리는 진리에 도달하는 방식을 제어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어느 순간 진리에 도달한다. 진리에 도달하는 순간을 알아차리지 못하기도 한다. 진리는 연기처럼 흩어지지만 그러한 순간은 존재한다.

소설가 정지돈은 영화 <인히어런트 바이스>를 설명하면서 철학자 해리 프랭크버트,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의 책 개소리에 대하여(2005)를 인용한다. 프랭크버트는 “우리 문화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징 가운데 하나는 개소리가 너무도 만연하다는 사실이다. 모든 이가 이것을 알고 있다. () 그런데 우리는 이런 상황을 당연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는 거짓말과 개소리를 구분한다. 그에 따르면, 거짓말을 하려면 진실이 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다. 거짓말은 의도를 가지고 계획되고 실행된다. 반면 개소리는 무계획적이고 즉흥적이며 목적도 의미도 없다. 한마디로 그냥 싸지른다.’

프랭크버트는 현대 사회의 개소리 확산을 큰 문제로 보았다. 개소리는 진리의 권위를 무시함으로써 사람들을 회의주의로 이끌기 때문이다. 개소리는 객관적 실재에 대한 믿음을 무너뜨리고 정확성에 대한 규율과 헌신을 개인적 차원의 문제로 환원한다. 그렇기 때문에 문화는 쇠퇴한다. 여기에 한마디 더 보태자면 개소리 때문에 문화가 파괴된다. 개소리쟁이는 자신의 입에서 나오는 것들이 진리이든 거짓이든 상관하지 않는다. 사실의 맥락을 무시하고 필요한 맥락을 자유자재로 위조해 낸다.. 때로는 창의적이기까지 하다. 그들의 의도는 허위냐 사실이냐에 있는 게 아니라, 실제와는 무관하게 자신의 속셈을 부정확하게 진술하는 데 있다.

흔히 현대를 탈진실의 시대라고 말한다. 사전적으로 탈진실은 진실에서 벗어난다는 뜻으로, 객관적인 사실이나 진실보다 개인의 신념이나 감정이 여론 형성에 더 큰 영향을 미치는 현상을 이른다. 거짓말과 개소리는 과거에도 있었다. 특히 정치는 예로부터 권력자들의 거짓말과 개소리가 난무하는 영역이었다. 일반 시민들은 그런 정치의 거짓말과 개소리에 맞서 사실을 지켜내기 위해 언론에 이를 보호하는 임무를 주었고, 대학에는 진리를 수호하는 최후 보루 역할을 맡겼다. 민주주의는 권력에 투명성의 의무를 부여하여 이 세계가 사실의 기반 위에 작동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해왔다. 그런데 의도치 않게 탈진실의 시대를 맞이했고, 탈진실의 시대는 그런 노력의 패배 또는 실패로 읽힐 수 있다.

다시 말하지만 탈진실의 시대의 본질은 거짓말이 아니라 개소리에 있다. 과거의 권력자들과 대중은 공적인 말들이 표면적으로라도 진실의 포장을 입고 있길 원했다면, 우리 시대의 권력자들과 대중은 이제 그것이 진실과 무관한 개소리일지라도 자기 이익에 부합한다면 이를 기꺼이 내뱉고 수용한다.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일찍이 왜 정치가 거짓말에 특화된 영역인지 고찰했다. 그녀는 정치가 참과 거짓, 형이상학적인 진리의 영역이 아니라 가변적이고 취약한 사실적인 진리의 영역, 견해에 기반을 둔 행위라고 전제하고, 민주적인 참여를 통해 거짓말을 예방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진실과 거짓의 경계는 점점 불분명해지고 있다. 쏟아지는 정보, 얽히고설킨 네트워크 속에서 실제 사태가 어떻게 전개되는지 제대로 이해하기 어렵다. 이해 자체가 성립 불가능할 수도 있다. 핀천은 바로 이 점을 역설한다.

핀천의 소설이나 앤더슨의 영화 등 예술에서 개소리는 꼭 필요하다. 예술에서 곱고 정갈한 소리는 있으나마나 하거나 불필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 세계에서 개소리는 단지 개소리일 뿐이다. 개소리는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조리 없고 당치 않은 말’ 일뿐이다.’일 뿐이다. 그런데 요즘 들어 부쩍 그런 개소리들이 곳곳에서 넘쳐 나고 점점 시끄러워지고 있다. 개소리를 하는 당사자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런 개소리를 듣는 사람들에게는 끔찍한 소음일 뿐이다. 그런데 문득 개소리를 하는 사람들의 생각이 궁금해진다. 진실을 말한다고 생각할까? 아니면 거짓말을 한다고 생각할까? 그것도 아니면 개소리를 하고 있다고 사실을 알고 있을까?

 

 

“대상화와 경쟁을 버리고”

이성수_ 힘빼고컴퍼니 대표, 배우, 연출가

나는 가끔 접근성이 무섭다. 시각장애 당사자로서 너무나 필요한 것이지만, 이따금씩 접근성은 나를 대상화하며 수혜자로 만들기도 하기 때문이다. 도움을 받는 사람은 위축되기 십상이다. 그런 순간이 모래알처럼 쌓이는 삶은 너무 무겁다.

인간으로서 위축되지 않는 삶 그리고 장애가 있는 몸이지만, 자긍심을 느끼며 사는 삶을 살고 싶다. 그것이 이렇게 어려운 일인지 몰랐다. 우리의 접근성은 그러한 것을 해소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한다. 그러기 위해 버려야 할 것들이 있다. 대상화와 경쟁심이다.

접근성은 당사자성이 중요하다고들 하는데, 그 당사자성의 범주를 특정 장애인에 국한하는 것에 대해 필요한 일이지만 우려스럽기도 하다. 당사자성에는 예외가 없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싶다. 경쟁심도 마찬가지로 양날을 가지고 있다. 현실 세계에서 경쟁을 완전히 제거할 수는 없겠으나, 가끔은 극단적으로 경쟁이 사라진 세상을 상상해 보기도 한다.

 

 

“기억 없는 정책, 소모되는 문화- 지역문화예술이 존속할 수 있으려면”

정청비_ 영화문화집단 파도씨네 대표

 

지역에서 문화예술 활동을 이어가노라면 익숙한 풍경이 있다. 창작 이전에 ‘사업자’로 호명되고, 예술적 실험은 공모를 위한 기획서 안에서만 허용되는 현실. 예술은 더 이상 삶을 표현하거나 감각을 실험하는 언어가 아니라, 선정된 사업명 아래에서 ‘기획된 수행’으로 존재하며 자립 기반은 없고, 사업의 주기가 곧 창작의 주기가 된다. 문제는 이 구조가 이제는 너무나도 ‘정상’처럼 여겨지고 있다는 데 있다. 지역 문화예술인은 행정 체계가 정한 기준에 맞춰 자신을 계속 증명해야 하며, 시민은 ‘향유자’라기보다는 ‘제공한 프로그램의 대상자’로 여겨진다. “문화는 공짜로 누릴 수 있는 것”이라는 인식은 여전히 강하고, 후원과 기부 같은 자발적 참여 구조는 제한적이다. 예술에 돈을 쓴다는 것 자체에 대한 사회적 동의가 부족하다 보니, 예술가와 기획자는 늘 죄송한 마음으로 ‘성과지표’에 매달린다.

이런 구조에서 과연 진정한 문화 생태계는 만들어질 수 있을까. 지금의 정책은 과잉된 축제와 이벤트, 매해 반복되는 공모사업을 통해 무언가 하고 있다는 가시성만을 중시한다. 수많은 영화제와 지역 행사들이 만들어지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시민의 문화적 삶을 확장시켰는지 물어야 한다. 오히려 오래도록 꾸준히 자리를 지켜온 공간이나 축제는 지자체장과 담당자가 바뀌면 너무 쉽게 사라진다. 기억은 쌓이지 않고, 해마다 정책은 처음으로 돌아간다. 이것이야말로 기억 없는 정책’, ‘소모적인 문화행정의 민낯이다.

정책은 매번 새로워야 할까. 오히려 중요한 것은 지속성자율성이 아닐까. 단발성으로 끝나는 게 아닌, 사업과 구별조차 되지 않는 정책보다 지역 예술인과 공간이 장기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기초지원 체계가 필요하다. 실험과 실패가 허용되고, 창작이 성과로 이어지기까지의 시간이 정책 안에서 보장되고, 행정기관과 문화재단 역시 더이상 관료적 구조에 갇혀 있기보다 현장의 주체들과 상시적으로 소통하고 협의하는 구조가 마련되어야 한다. 시민 또한 단순한 수혜자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문화를 책임지는 공동체의 주체로 자리 잡기 위해서는 예술을 이해하고 참여할 수 있는 문화교육, 그리고 다양한 방식의 후원 시스템이 필요하다. 문화예술은 무상으로 제공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언어이며 관계의 형식이다. 부산 금련산 자락에서 오랜 시간 자리를 지켜온 복합문화공간 <공간 나.라>는 그 언어의 실천장이었다. 인문학 강연, 독립영화 상영, 다양한 연령대의 지역 예술인과 주민이 만나는 다양한 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문화가 소비재가 아닌 삶의 일부로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줬다. 그러나 운영자가 고인이 되면서 이 공간은 보호받지 못한 채 매각되었고, 그 시간과 의미는 정책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았다. 축적된 시간이 정책적 기억으로 남지 못하는 사회, 바로 그것이 기억 없는 정책의 본질이다.

최근 지역 곳곳에서 기록하려는 움직임이 자생적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은 중요한 변화다. 지역의 예술인, 기획자, 활동가들은 사라지는 공간과 장면들을 기록하고, 각자의 언어로 남기기 시작했다. 이는 단지 과거를 보존하는 일이 아니라, 단절을 거부하고 연속성을 만들어내려는 문화적 저항이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정책은 이런 움직임에 응답하는 것이다. 새로움을 만드는 일보다, 사라지지 않을 문화를 지키는 일, 기억을 이어가고 문화예술이 소모되지 않는 생태계를 만드는 일이 더 절실하다.

 

 

“왜 문화정책은 늘 ‘선발’ 구조일 수밖에 없는가?”

지구_ 극작가, 연극연출가

제가 소극장에서 예술 지원사업을 받으며 해왔던 공연들을 떠올립니다. 제작비보다 티켓 수익이 덜 나왔던 공연들이었습니다. 상업화나 금전적 이익을 목표로 두지 않고 연극을 하고 있는 저는, 지금 사회가 추구하는 가치와 멀리 있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저는 예술인기본소득이 필요하고, 예술을 하기 위해서는 문화예술 지원사업에 지원합니다. 작년 말부터 저와 제가 속한 단체 또모함씨어터의 다짐은 최대한 많은 지원사업에 지원하는 것이었고, 번번이 떨어졌습니다. 그동안 저는 소득 없이, 지원서를 반복해 쓰는 노동을 했습니다.

최근 겨우 심사가 없는 예술 활동 준비금을 받아 숨통이 틔었습니다. 이제 그 예술 활동 준비금으로 다음 작업을 할 것입니다. 더 이상 그 작업의 필요성과 예술성, 시의성, 저와 또모함씨어터의 능력 등에 대해 증명하고 설득하는 말을 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화예술 지원 규모가 늘어나면 제가 지원사업에 선발될 수 있을까요? 계속 누군가가 지원서들을 심사할 테고, 여전히 누군지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증명하고 구구절절 설득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두 달 치의 소득을 위해 몇 주 동안 지원서를 쓰겠지요.

문화예술 지원사업에서 예술인들은 선발되고, 탈락하고, 그 구조에 갇힙니다. 단순히 문화예술에 투자하는 예산만 늘릴 것 아니라, 그것이 어떻게 예술가에게 배분되어야 하는지도 고민되어야 합니다. 정부는 선발 과정 없이 예술가의 기본소득을 보장해야 합니다. 또한 예술창작 지원 규모를 늘리되, 그것이 예술가를 탈락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예술가들이 창작할 수 있는 조건을 보장하는 방식으로 나아가야 할 것입니다.

 

 

“프로젝트가 아닌 삶으로서의 예술”

최엄윤_ 독립문화기획자

흔히 '현장의 목소리'를 이야기하지만, 예술가의 목소리는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 대변되어 왔는가. 문화예술계에도 암묵적인 위계와 사다리가 존재한다. 생계의 어려움과 고립 속에서도 자신의 작업을 묵묵히 이어가는 예술가와 활동가를 대신해 말하는 이는 종종 ‘전문가’라는 이름으로 등장한다. 언제부터인가 문화예술계는 컨설팅과 용역 중심의 구조로 재편되어 왔다. 설명하고 평가하고 심사하는 구조가 아니라, 이제는 예술가와 활동가 스스로가 연대하고 자립할 수 있는 무대를 어떻게 함께 만들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때다.

굵직한 예산 사업들이 쏟아지고, 지원금이 끊기면 마치 문화도 사라지는 듯 비판의 목소리는 커지지만, 현장을 지키는 예술가와 활동가는 여전히 삶의 자리에서 꾸준하고 성실하게 남아 있다. 수십억의 예산을 단기간에 집행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정책사업에서 얼마나 많은 비정규직 노동자가 소모되어 왔는가.. 문화라는 이름 아래 반(反)문화적인 노동 구조를 외면한 채, 브랜드 경쟁에 몰입하고 정권의 입맛에 따라 일희일비하는 사이, 문화예술계 역시 자본주의적 착취 구조를 얼마나 더 충실히 답습해 왔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다수, 대중, 멋진 것, 반짝이는 것, 돈과 수치로 환산할 수 있는 것을 중심으로 사고해 왔고, 그에 끌려갔다면 이제는 가까운 것, 드러나지 않지만 알아차려야 하는 것, 작고 느린 것, 돈보다 사람 중심의 가치, 그리고 화려한 것을 떠받치는 불안정한 노동에 더 집중할 때다. 그런 감각을, 그런 관계를, 그런 형식을 돌아보고 강조해야 한다.

예술가는 프로젝트를 대신해 주는 용역자도, 지원금의 수혜자도 아니다. 예술가는 노동자이며, 주거·의료·교육·돌봄의 권리를 가진 시민이다. 문화예술 정책은 이 기본적인 권리 위에서 출발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