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번 기획은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에서 시도되었던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기록하고자 하는 취지로 준비되었습니다. 서울혁신파크는 한국의 대도시에서 좀처럼 시도되기 힘들었던 도심 공간 안에서의 공유 개념에 대한 실험, 혁신에 대한 시도들, 문화적 행위들이 이루어지던 장소이자 프로젝트입니다. 이 실험은 때로는 도시문화정책의 선구적 지점을 보여주기도 했고 때로는 시행정 관행의 한계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이 공간에 관계 맺었던 이들의 다양한 관점, 가감 없고 자유로운 기억과 목소리를 수집하여 남기고 전하고자 합니다.
* [기획연재: 서울혁신파크의 기억들]은 4회차로 마무리됩니다. 그동안 관심에 감사드립니다.
①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았던 야외공간의 기억 (정혜선)
② 서울혁신파크와 함께 한 비건페스티벌의 시작 (강소양)
③ 필요에서 출발했던 연대와 협업(권소진)
④ 공동의 마당에 대한 3가지 기억(염신규)
개인적으로 서울혁신파크(이하 “혁신파크”)와는 몇 가지 서로 다른 맥락의 접점을 갖고 있다. 우선 가장 오래된, 뿌리깊은 인연은 은평구 지역민으로서의 정체성이다. 1970년대 중반 가족이 은평구로 이주하여 꽤 오랫동안 은평구와 그 주변에서 살았었다.(현재는 경기도 거주) 혁신파크로 명명된 공간은 오랫동안 은평구 사람들에게는 “보건원”이라 불렸던 매우 익숙한 장소였다. 혁신파크는 과거 보건복지부 산하의 국립보건원을 포함한 다양한 연구기관, 시설이 존재했던 곳이다. 이런 동네 사람의 정체성이 첫 번째라면, 두 번째는 혁신파크 입주단체의 일원이기도 했다. 물론 상근을 했던 것은 아니지만 조합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예술인 사회적협동조합(자바르떼)이 꽤 오래 혁신파크 입주단체였다. 사무실에 자주 가지는 않았지만 이따금씩 회의를 하러 갔고 무엇보다 1년에 한 번씩 조합원총회를 하러 가곤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017년에 혁신파크 야외공간 활용에 관해 작은 연구를 맡아서 수행한 적이 있다. 인근 지역주민이었고, 입주단체원이었으며, 연구자의 시선으로 바라봤던 적도 있다. 그래서 혁신파크의 기억을 떠올리면 이런 서로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약간의 이질적인 면도 있는 다양한 맥락들이 함께 떠오른다.
우선 가장 먼저는 지역주민으로서 그 공간, 장소에 대한 기억이다. 잠시 경기도 고양시에 나와서 살다가 2015년 봄에 은평구로 다시 이주했는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서울혁신파크가 문을 열었다. 오랫동안 지역주민으로서 “보건원” 자리로 인지했던 곳이 다양하고 실험적인 혁신 활동이 벌어지는 곳으로 탈바꿈한다고 하니 마음이 설렛던 것… 이, 아니라 사실 별로 그런 쪽으론 관심이 없었다. 뭐 일단 한국에서 혁신(이노베이션innovation)이란 말이 남발되는 것에 대한 삐딱한 의심이 가득할 때였고 도시 정책에서 지나치게 꾸며진 공간들이 남발되는 것에 대한 뿌리 깊은 불만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일상을 살아가는 삶의 공간으로 어떤 장소와 접촉하게 되는 지역민들은 사실 그런 혁신이니 실험이니 하는 것들에 대하여 크게 관심을 갖거나 호의적이기 쉽지 않으며 대부분 무관심하게 본다. 또한 그랬던 이유 중 하나는 혁신파크로 조성된 “보건원” 자리가 은평구 안에 있지만 지역 안에서 상당히 큰 섬, 혹은 성 같은 곳이었던 탓도 있다. 길 하나만 건너면 주택가가 있지만 매우 거대한 면적을 차지하며 1960년대 후반부터 조성된 “보건원”은 권위주의 국가 시대의 공공건물답게 높고 굳건한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었고 동네 사람들이 친숙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2010년 “보건원”이 오송으로 이전할 때까지 그 장소는 지역민들에게는 지역 안에 있지만 감히 쉽게 범접할 수 없는, 미지의 땅이었던 셈이다. 2015년 혁신파크가 형성되면서 지역민 입장에서 좋았던 것은 새로운 혁신의 실험 어쩌구 때문이 아니라 그냥 공간이 열렸기 때문에 좋았다. 정부의 힘이 막강했던 권위주의 시대의 공공기관 시설답게 도심권 안에 있으면서도 상당히 넓은 부지를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안에 작은 숲이라고 불러도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꽤 많은 녹지공간이 존재했다. 마침 그 무렵부터 함께 살게 된 개와 함께 혁신파크를 꽤 많이 돌아다녔다. 나뿐만 아니라 아침저녁으로 혁신파크를 산책하는 주민들이 꽤 많이 있었고 특히 아이들을 데려오는 부모들이 많았다. 그러니까 지역민 입장에서 혁신파크는, 혁신이 아닌 파크에 방점이 찍힌 공간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단지 야외공간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닌데 혁신파크에는 은근히 쓱 들어가 남의 눈치 안 보고 책을 읽거나 노트북으로 뭔가를 작업할 만한 공유공간이 꽤 많이 존재했고 그런 장소로서의 쓰임새가 동네 사람 입장에서는 “여기, 쓸 만하다”란 느낌을 받았다.
동네 주민 입장이 아니라 입주단체 구성원으로 보면 일단 비용의 저렴함이 가장 큰 장점이었을 것이다. 단체 살림을 책임지던 입장은 아니었기 때문에 상세한 내용까진 기억하지 못하지만 협동조합이 재정 문제로 상당한 어려움을 겪던 시기에 혁신파크 입주가 결정되면서 한시름 덜었던 것은 확실히 기억난다. 물론 노후시설이라서 불편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 불편함을 감수할 만큼 여러 가지 이득이 있기도 했다. 일단 대다수의 공공에서 제공하는 창업공간이나 공유시설과는 달리 공간적으로 매우 널찍널찍하여 다양하게 가변적인 활용이 가능했고 그러다 보니 조합원들이 훨씬 편하고 자연스럽게 공간을 찾을 수 있었고 애정을 갖고 공간을 함께 상상하고 꾸며가는 과정이 존재했다. 입주단체 전용공간뿐만 아니라 신청을 하면 쓸 수 있는 회의실 등 다양한 규모의 공유공간, 넓은 야외공간이 있어서 조합원들이 뭔가를 시도해 볼 여지가 많았다. 실제 조합원의 자발적 프로그램이 여럿 시도되기도 했다. 특히 좋았던 것은 우리 조합 외에도 다양한, 서로 성격이나 하는 일들은 다르지만 여하간 도시에서 뭔가 창의적이고 새로운 행위를 해보려는 집단과 사람들이 같은 공간에 함께 입주해 있었다는 점이다. 그중에는 본래 서로의 활동을 대충 알고 있는 경우도 있었지만 사실 더 많은 경우는 그런 활동이 있는지도 모르는, 그래서 “저들은 뭐 하는 이들인가?”라는 궁금증을 유발하게 만드는 경우가 훨씬 더 많았다. 이런 상이한 집단들은 혁신파크 공간의 공동 활용에 대한 공식적인 논의의 장을 통해서 안면을 익히기도 했지만 실은 서로의 활동을 구경하면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잠시 휴식 중 옥상에서 담배를 함께 피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때때로 맥주라도 한 캔씩 나눠 마시면서 친밀감을 형성해 갔다.. 그리고 그런 자연스런 친교의 시간이 가끔씩은 예상하지 못했던 협업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지역주민이나 입주단체원 입장이 아닌 문화정책 연구자 입장에서 보면 다소의 까칠함이 나오게 된다. 일단 그냥 피상적으로 바라보는 것과 달리 서울시 행정 조직은 아주 초반부터 혁신파크에 대하여 “가시적 성과”라는 행정의 잣대를 놓지 않으려고 했다. 당시 시장을 중심으로 한 선출된 서울시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혁신파크를 새로운 사회혁신의 실험장, 혹은 실험을 시민들이 체험할 수 있게 하는 일종의 전시장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매우 엄청난 부지를, 그것도 지가가 엄청나게 비싼 서울 도심권에서 공공이 유지하기 위해서 뭐 이러저러한 명분이 분명히 필요하긴 했다. 그런데 그것이 관료 집단의 성과주의 행정의 잣대와 맞물리면서 혁신파크 운영에 과도하게 개입되는 순간들이 있었다. 예컨대 혁신파크의 이용률에 대한 계량적 요구를 끝없이 했다. 얼핏 당연해 보이기도 하며 실제 상당한 언론들이 그걸 명분으로 혁신파크를 흔들어댔다. 도심 안에 있는 109,727m²의 막대한 공간이 사회혁신 실험이란 명분으로 이용률이 떨어진 채 방치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시 정부는 운영을 맡고 있는 측에게 혁신파크에서 벌어지는 각종 행사(특히 야외공간행사)의 참여자 숫자를 따져 물었고 그런 잣대를 가지고 운영 방향에 참견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축제 등 행사평가에서 주장되는 집객 숫자는 거의 99.9%가 믿을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특히 혁신파크처럼 단지 행사를 위한 장소가 아니며 공간의 성격이 복합적이고 이용자의 동선이 쉽게 파악될 수 없는 곳에서의 그런 계량적 잣대는 정확하게 측정하기가 원천적으로 힘들 뿐만 아니라 진짜 그걸 원한다면 상당한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이었다. 여하간 그런 허수의 성과가 혁신파크 운영에 개입해 들어가면서 내발적인 프로그램들과 가시적인 성과 잣대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행사들의 미묘한 충돌 양상이 나타나기도 했다. 이는 주로 야외공간에서 펼쳐진 행사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운영이나 시설 조성, 개보수에서도 어느 정도 나타난 양상이다. 특히 박원순 시장의 정치적 행보가 빨라질수록 혁신파크를 통해 서울시가 프로파간다로 밀고 있던 사회혁신을 의장하여 “전시”하는 식의 운영에 대한 압박이 강하게 나타났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민을 위한 대안적 공간을 찾아오기 위해
혁신파크는 매우 유의미하지만 한계가 분명했던 미완성된 도시 공간 실험이었다. 도심 안에 매우 큰 공공 공간을 잠시 동안이지만 시민과 다양한 도시 행위자들에게 내어주고 일정한 자율권을 주었다는 점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반면에 여전히 공간의 주인은 시 정부였고 그 이면에선 성과주의 행정과 관료주의, 다양한 정치 논리가 촘촘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시민과 행위자들이 스스로 쟁취한 공간이 아니었기 때문에 2023년 겨울을 마지막으로 그 실험이 아쉬운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일 것이다. 누군가는 혁신파크에 대하여 덴마크의 아나키 자치공동체 마을인 크리스티아니아(Christiania)와 같이 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지만 크리스티아니아 역시도 덴마크 정부가 조성하거나 허용해서 만들어진 곳이 아니다. 덴마크에 우파 정권이 들어섰던 1970년대 중반 크리스티아니아 역시도 철거가 결정되었었다. 2007년에도 덴마크 정부는 그 지역의 재개발을 결정하고 포크레인과 전투경찰을 투입했었다. 하지만 크리스티아니아 공동체는 학교를 세우고 축제와 공연, 토론회를 만들면서 저항했다. 문화적 저항이기도 했지만 물리적 저항 역시도 동반되었다. 크리스티아니아를 지킨 것은 공동체인들의 결속력뿐만 아니라 그런 대안적 공간, 장소의 필요에 대하여 공감하는 시민들이 우군으로 자리했으며 그들이 직접적으로 정치권력에 맞섰기 때문이다. 즉 크리스티아니아는 (그 역시 완전하진 않지만) 시민들에 의해 쟁취된 공간이라면 혁신파크는 권력이 잠시 허용했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혁신파크를, 혹은 혁신파크 같은 시민들을 위한 대안적 공간을 되찾아오기 위해서 무엇을 해야 할까? 가장 빠른 길은 그런 공간의 필요성을 느끼는 이를 지자체장으로 뽑거나, 지자체장에게 그걸 설득하는 것이다. 하지만 혁신파크가 그랬듯이 그런 방식은 언제나 한계에 부딪힌다. 공간이 지향하는 가치와 자율성은 자주 침식되고 공간의 수명조차 늘 시한부일 수밖에 없다. 따라서 그런 노력도 아주 필요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장소의 필요에 대하여 입체적이고 집요한 설득이 필요하다. 권력자들보다, 특히 평범한 시민들에게 말이다.
체감적으로 혁신파크의 매력은, 특히 초창기의 어수선하고 전반적으로 썰렁하게 비어있던 시절에 존재했다. 혁신파크가 사회혁신이란 브랜드로 의장 되어 갈수록 그 장소와 사람들이 뿜어내던 생동감과 매력이 덜해지고 있다고 느꼈다. 비어있는 장소에선 사람들이 새로운 행위를 하고 스스로가 무엇인가를 꾸며내지만 이미 기존의 사업과 프로그램, 시설로 꽉 찬 공간에선 역동적이고 재미난 행위들이 잘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 마지막 단락은 연구자의 시선이 아니라 동네 주민 입장에서 체감이다. 함께 나눌 수 있는, 꾸며진 정원이 아닌 뭔가 해볼 수 있는 공동의 마당으로 공간을 다시 만나고 싶다.
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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