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주: 이번 기획은 2015년부터 2023년까지 서울 은평구 녹번동 일대에서 시도되었던 서울혁신파크에 대한 다양한 기억을 기록하고자 하는 취지로 준비되었습니다. 서울혁신파크는 한국의 대도시에서 좀처럼 시도되기 힘들었던 도심 공간 안에서의 공유 개념에 대한 실험, 혁신에 대한 시도들, 문화적 행위들이 이루어지던 장소이자 프로젝트입니다. 이 실험은 때로는 도시문화정책의 선구적 지점을 보여주기도 했고 때로는 시행정 관행의 한계에 갇히기도 했습니다. 그 모든 것에 대해 이 공간에 관계 맺었던 이들의 다양한 관점, 가감 없고 자유로운 기억과 목소리를 수집하여 남기고 전하고자 합니다.
① ‘하울의 움직이는 성’ 같았던 야외공간의 기억 (정혜선)
② 서울혁신파크와 함께 한 비건페스티벌의 시작 (강소양)
“여기 혁신파크 냄새 난다, 엄마. 혁신파크 그리워”
혁신파크가 있는 은평구를 떠나 지금 살고 있는 송파구로 이사온 후에도 아이들은 종종 이렇게 말하곤 했는데, 그때마다 저는 아이들이 말하는 혁신파크 냄새라는 것이 어떤 건지 짐작하기 어려웠어요.
혁신파크가 곧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고, 혁신파크를 추억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 하여 아이들과 함께 다시 혁신파크에 갔던 날. 미래청 계단을 오르며 아이들이 설명해 주었는데, 알고 보니 아이들이 말했던 혁신파크 냄새란 오래된 콘크리트 건물에서 나는 먼지 냄새를 말하는 거였더라구요. 아이들이 그리워했던 혁신파크 냄새의 정체라는 게, 방향제 냄새도 아니고, 꽃냄새 풀냄새도 아니고, 뭉근한 사람냄새도 아닌 콘크리트 먼지 냄새였다니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지만, 생각해 보면 당시의 혁신파크를 설명하기에 그만큼 직관적인 표현이 또 있었을까요.
당시의 입주 단체들이 ‘서울의 사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얼마나 야심찬 활동을 계획/실행 하고 있는지’를 설득하는 오디션을 거쳐, 제법 높은 경쟁률을 뚫고, 부푼꿈을 안고 배정받은 사무실은 질병관리본부가 이전한 2010년부터 2015년까지 버려져 있던 건물, 콘크리트 먼지 냄새 가득한 이른바 ‘미래청’이었어요.
냉난방 TF와 파크 어벤저스
혁신파크 조성초기, 입주단체 관리업무를 총괄하던 중간지원조직 ‘서울혁신센터’는 네트워킹 행사에 공을 들이는 듯 했어요. 이름하여 혁신가들을 한곳에 모아 놨으니, 그들간의 네트워킹을 강화하여 융복합 시너지를 내고자 함이었는데, 네트워킹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네트워킹이라는 건 언제 생겨나는건지, 그저 막연하게 자기소개를 반복하기도 지겨워질 무렵 입주단체간 네트워킹은 뜻밖의 지점에서 생겨났죠.
건물 이름이 무색하게도, 미래청은 아직 폐허의 기운을 간직하고 있었어요. 여닫을 때마다 끼익끼익 소리나는 오래된 샤시창은 제대로 맞물리지 않아 외부의 추위, 더위, 소리, 냄새를 고스란히 사무실 안으로 전달해 주었는데, 냉난방도 되지 않는 열악한 입주환경에 입주단체들의 불만의 목소리가 연대하기 시작한 거예요. 당시의 투쟁적인(?) 분위기에는 ‘네트워킹’보다는 ‘연대’라는 말이 걸맞을 듯 해요. 이상한 계기로 연대감이 싹트긴 했지만, 그후 혁신파크에서 나타난 수많은 협업들의 성과에 비추어 볼 때 그때 만들어진 냉난방TF는 혁신파크 협업의 초석이었다고나 할까요.
혁신파크 협업의 초기형태는 우리가 하는 교육 프로그램에 강사로 모시거나, 케이터링 등 제품을 구매하는 형태의 단순한 협력이었어요. 그러다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수다 떨고 브레인스토밍도 하면서 재미있는 작당을 시작했죠. ‘미스터 론리’라는 프로젝트였어요. 프로젝트 부제는 “나는 나밖에 고용할 수 없는가”였죠. 당시에 서울혁신파크에 1인 기업가가 많았거든요. 고정적으로 직원을 고용하기 부담스러운 1인 기업가들끼리 서로가 서로의 직원이 되어주면 어떨까 하는 발상에서 1인 기업가 네트워크를 확장하는 프로젝트였는데, 그때 탄탄하게 다져진 멤버들끼리는 여전히 긴밀하게 협업하고 있어요. 우리끼리는 ‘파크어벤저스’라고 불렀는데, 언제든 도움이 필요할 때 달려와 주는 고마운 사람들이 생긴거죠.
‘틀림’이 아니라 ‘다름’
제 인생은 혁신파크에 입주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거예요. 혁신파크를 알기 전의 나는 세상과의 이질감에 자주 시달렸어요. 나에게 뭔가 문제가 있는 게 아닐까, 문제가 있다면 도대체 뭘까. 스스로 자책도 많이 했어요.
혁신파크에서 각자 자기만의 세계관이 분명하고 개성이 넘치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나의 그것 역시 ‘틀림’이 아니라 ‘다름’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그동안 나를 괴롭히던 어떤 자책감으로부터 해방되었어요. 예전과 다름없는 똑같은 ‘나’였는데, 혁신파크 속의 나는 더 빛나고 더 멋지고, 더 평온했어요. 나 자체로 수용되는 평온함이요. 그곳의 혁신가들은 크던 작던 혁신파크의 품에서 나름의 위안을 받았을 거라고 생각해요.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혁신파크의 콘크리트 먼지 냄새를 그리워했던 아이들의 마음을 헤아려 봅니다. 아이들은 미로처럼 복잡한 미래청 4층 복도에서 엄마 사무실을 찾아 헤매다가 만났던 어른들이 참 좋았다고 했어요. 그들이 가지고 있던 타인을 향한 온기와 자유분방한 열정에 아이들도 매료되었던 게 아닐까 해요.
아이들이 혁신파크가 그립다 말할 때 마다 저도 속으로 되내이곤 합니다. “응 나도.”
권소진. CHRD대표. CHRD는 인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갈등관리를 하는 교육회사입니다.
2016년~2017년 서울혁신파크 첫 입주단체 자치회장을 맡았습니다. 엄마가 혁신파크 (자치)회장이라는 사실이 그렇게도 자랑스러웠던, 여전히 가끔은 서울혁신파크를 그리워하는 두 명의 중학생 남매를 키우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