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 심의관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정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지난 1월 24일 문화체육관광부의 공공기관 및 유관기관 대상 확대기관장회의를 전하는 기사는 유인촌 장관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다시 한번 ‘책임심의제’ 도입을 위한 기관의 노력을 촉구했다는 것이다. (유인촌 "책임심의제 무조건 시행…올해 기관 간 칸막 없애겠다")
기사에서 ‘다시 한번’이라고 언급한 것은 유인촌 장관의 취임 기자간담회에서도 ‘책임심의관제’를 강조했기 때문이다. 책임심의관제는 “문화예술계를 지원하는 산하 기관 직원들이 심의 결과를 평생 책임지도록 하는 제도”로 “블랙리스트 재발 방지 대책”이라고 강조한 바 있다.(유인촌 "책임 심의제 도입하겠다" )
이렇게 여러 차례 책임심의관제 도입을 강조하고 있지만 정작 책임심의관제의 구체적 내용이 무엇인지는 모호하다. 기사를 통해 유인촌 장관의 조각조각의‘말’만 기사로 전해질 뿐이다. 비교적 정보공개가 이루어지고 있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문예위)에서 관련 논의나 내용을 찾을 수가 없다. 그런데 기사에 따르면 이날 회의에서 정병국 위원장은 “장관이 강조하신 책임 심의제와 동일한 전담 심의제를 (기관에서) 시행한다”며 “추가로 올해부터 수시 공모하는 7개 분야에 대해서 전담 심의관을 선발하고 3월 이후에 투입될 예정이다” “시범적으로 시행한 후 이를 보완해 내년에는 모든 분야에 전담 심의관을 직원 중에서 선발해 시행하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대체 예술위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예술위 홈페이지에서 관련 자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책임심의관’을 키워드로 검색하면 2009년 자료들이 정렬된다. 예를 들면 2009년 6월 17일 발표된 “2010년도 예술지원정책 개편방향 발표” 보도자료를 보면 예술지원전문심의관제 도입 추진을 소개하고 있다는데 유인촌 장관의 조각조각의 말들과 거의 그대로 일치한다.( 보도자료 바로가기 )
이 자료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책임심의관제는 이미 2009년 문예위의 지원제도를 개편하면서 도입되었던 제도다. 십 수년 전 장관을 할 당시 도입했던 제도를 그대로 복사해서 붙여놓은 것 같은 조각 조각의 말들로 다시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다시 2009년을 살고 있는 것인가. 물론 지난 제도를 다시 도입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이전에 시행된 제도에 대한 평가를 동반해서 달라진 환경에서 어떻게 개선하겠다는 것인지를 설명하는 것은 제도 개편에서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합리성이 아닌가.
게다가 지금 발표에서는 직원의 심의 참여 이외 다른 심의위원들은 어떻게 구성하는 것인지, 심의 결과는 심의위원 합의에 의해 이루어지는데, 그 결과에 대해 ‘평생’ 책임지는 것은 직원만인지 아니면 외부 심의위원에게도 ‘평생’ 책임을 지게하겠다는 것인지, 그 방법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사후 컨설팅” 등이 직원이 심의에 참여해야만 가능한 것인가.
게다가 직원의 심의 참여가 블랙리스트 재발방지책이라는 것은, 블랙리스트 사태에 항의하고 진상조사에 참여했던 예술계에 대한 우롱이 아닐 수 없다.
유인촌 장관은 취임 기자간담회에서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진상조사 위원회 백서에 대해 “무책임하게 일방적으로 자기들 입장에서 만들어진 백서다. 대부분 '이런 소문이 있다더라', '누가 주장한다더라'라고 돼 있어 신뢰를 갖고 있지 않다.”고 했다고 한다. 자신의 이름이 104번 언급된다는 기자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이명박 정부 당시의 블랙리스트 사건 조사에 한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위원회의 공동 위원장이었던 문재인 정부 도종환 장관은 미진한 조사에도 불구하고 위원회를 서둘러 종료했다. 그렇다고 유인촌 장관이 비난할 만큼 모든 조사가 미진한 것은 아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 블랙리스트가 실행된 과정은 비교적 상세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미 ‘박근혜정부의최순실등민간인에의한국정농단의혹사건규명을위한특별검사’ 조사 내용이 있었고 이후 개별 사안에 대해서는 블랙리스트 실행 문건과 관계자들의 진술을 확인했다. 특히 문예위에서의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은 매우 자세하게 기술되어 있다.
문예위 블랙리스트 실행은 청와대-문체부-문예위로 블랙리스트가 내려오고 역방향으로 지원서류가 올라가는 등의 과정으로 이루어졌다. 김기춘 등 블랙리스트 재판에서 지원서류를 상위 기관에 보고하는 행위의 불법성을 다투었다. 청와대는 문체부 직원들에게 문체부 직원들은 문예위 직원들에게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했고 직원들은 그 지시에 따랐다. 당시 직원들이 심의에 참여하지 않아서 이러한 불법적 지시를 수행했던 것인가. 직원들이 심의에 참여했다면 블랙리스트 실행에 가담하지 않았을까. 블랙리스트 실행과정은 고스란히 우리의 정책전달체계가 얼마나 수직적이고 위계화되어 있는지를 보여준다. 이러한 위계화를 바꾸지 않고 직원에게 평생 책임지라고 윽박지른다고 문제가 해결될까. 유인촌 장관은 이에 대해 먼저 답해야 한다. 블랙리스트 이후 문예위 직원들에게는 징계가 있었다. 솜방망이 징계라고 예술계의 반발이 있었지만. 그러나 문예위 직원들에게 블랙리스트 실행을 지시한 문체부 직원들은 어느 누구도 징계받지 않았다. 이에 대해서도 유인촌 장관은 답하기 바란다.
예술환경의 변화도 생각해봐야 한다. 지금은 2024년이다. 21세기가 시작된 지도 사반세기가 되어가고 있다. 문예위에 처음 책임심의관제를 도입했던 2010년으로부터도 15년이 흘렀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블랙리스트와 팬데믹을 겪었다. 사회도 변하고 예술계도 변했다. 이미 90년대를 지나면서 한 장르를 포괄한다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 예술계는 팽창하고 있고 다양화되고 있다. 2010년부터 문예위에서 시행되던 책임심의관제는 장르별로 심의위원을 정하고 문예위 지원사업을 전담해서 심의하는 것이었다. 당시 책임심의관제 도입은 직원의 심의위원 참여만이 아니라 책임성 강화를 위해 장르별로 책임심의위원들이 예술위 지원사업 심의를 전담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광범위한 블랙리스트 실행과정에서 심의위원풀제로 재편되었다. 지금은 그때보다 예술계 자체가 더 분화되고 다양해졌다. 그런데 몇몇의 심의위원이 모든 지원사업을 심의한다는 것이 과연 합리적인가. 예술계의 다양성을 모두 포괄하는 전문성이라는 것이 과연 가능한 것인가.
"무조건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되는 거"의 기시감
다시 앞의 기사. “책임 심의관이 참여할 수 있도록 개정하는 게 아니라 무조건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되는 거예요.” 유인촌 장관의 이 말이 어떤 맥락에서 나온 것인지 기사만으로는 알 수 없다. 그런데 “개정이 아니라 무조건 그렇게 해야 되는 거”라니. 제도 개편을 위한 근거 마련에 대한 이야기인 것 같은데, ‘무조건’ ‘그렇게’ 하라는 것인가.
문예위 제364차 위원회 전체회의(2023년 11월 3일) 속기록 5쪽부터는 이날의 여섯 번째 의결안건으로 ‘문화예술진흥기금사업 지원심의 운영규정 개정(안)을 다룬다.(속기록 바로보기 ) 안건에 대한 사무처의 보고를 보면 직원이 심의위원으로 참여하기 위해서는 기존 규정이 “심의위원은 ’외부인사‘”라고 되어 있는 것을 “외부인사와 사무처 직원으로 한다.. 다만 사무처 직원의 포함 여부 및 인원수는 위원장이 결정한다.”로 개정한다는 것이다. 보고에 이어 정병국 위원장의 보충 설명이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위원들의 논의는 “비공개논의”로 확인할 수 없다. 이 안건은 “이날 회의에서 유보 처리하고 해당 내용은 추후 다시 검토”하는 것으로 의결한다. 속기록에 따르면 2024년 2월 위원회 전체회의 안건으로 상정할 예정이라고 한다. 지금은 3월이다. 아마도 2월 위원회 전체회의는 진행되었을 터이나 아직 속기록이 올라오지 않았으니 어떤 논의를 했는지 알 수 없다. 회의 결과도 아직 알 수 없다.
“무조건 그렇게 해야 되는” 것이라는 유인촌 장관의 발언은 개정안 안건이 유보된 2023년 11월 전체 회의와 이 안건이 재상정될 예정이었던 2024년 2월 전체회의 사이에 있었다. 문체부가 지시하면 문예위가 그에 따라 의결하는 것, 근거도 없이 “무조건 그렇게 하도록 해야 되는 거”. 블랙리스트 실행 과정에서 문체부와 문예위의 관계가 바로 그러했다.
김소연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연극평론가.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커뮤니티와 아트’ ‘삼인삼색 연출노트’ ‘극작가리서치워크숍’ 등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연극비평의 대상으로 정책을 비평하는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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