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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슈: 예술인고용보험] 정책 생산에 개입하기

CP_NET 2019. 9. 1. 20:38

광장을 가득 채운 촛불로 정권은 바꿨지만 평범한 사람들의 세상은 바뀐 것이 없어 보인다. 설상가상 이제 광장마저 빼앗길지 모르는 상황, 절망은 깊어지고 분노는 차오른다. 하지만 세상이 아니라 사람을 살펴보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들여다보면, 변화가 없지는 않았다. 심증만 있었던 블랙리스트가 공개되면서 박근혜 정권에 가장 분노했고 그래서 가장 먼저 광장을 점거했던 문화예술인들 사이에서도 분명 변화는 있었다.

 

모든 것이 2017년 이전의 제자리로 돌아가는 듯하지만,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와 문화예술노동연대라는 두 연대기구의 탄생과 활동은 우리가 여전히 전진하고 있다는 것을, 광장은 아직도 닫히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다.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를 중심으로 블랙리스트 진상조사와 제도개선을 위한 활동이 이어지는 한편, 문화예술노동연대를 중심으로 미조직 예술인과 함께하는 노동운동 또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고용이라는 것이 여전히 낯선 그래서 제자리라고 할 만한 것이 존재조차 하지 않는 예술인들이, 창작지원이 아니라 고용보험의 개선을 요구하며 문화예술노동연대를 조직한 것은, 특별한 주목을 요구한다. 1987년 광장에서 예술인들이 문화운동을 통해 노동운동에 연대했다면, ‘문화융성30년을 거친 2017년 광장에서 예술인들은 노동자 당사자로서 불안정비정규직 노동운동에 합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발단은 이렇다.

 

201777, 문재인 정권이 들어선지 두 달이 채 지나지 않았고, 도종환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취임한지 보름이 갓 지나지 않았던 시점, 문화체육관광부는 새예술정책 토론회를 개최하여 사회보장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현황 및 과제를 발표한다. 도종환 전 장관은 이 자리에서 최고은 작가의 비극이 다시는 없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우리는 문체부가 새 정부에 걸맞게, 적어도 이명박, 박근혜 정권보다는 나은 정책을 제시하리라 기대했다. 그러나 기대는 무참히 무너졌다.

 

문체부가 새 정부 예술정책이라며 제시한 고용보험제도안은 박근혜 정권이 준비해 왔고 2016년 새누리당의 조훈현 의원이 발의한 예술인복지법 개정안에 근거한, 한마디로 헌 정부의 낡은 정책이었다.

 

2013년 박근혜 정권은 4대 국정기조 중 하나인 문화융성과제 중 하나로 예술인 고용보험 적용 확대를 선정했고, 2016년 조훈현 의원이 예술인복지법 개정안을 발의한 바 있다. 그러나 이 개정안은 프리랜서 예술인이라는 모호한 표현 아래 자영업자에 준하는 기준을 적용, 원칙적으로 보험료 전액을 예술인이 부담하도록 하고 가입 역시 임의로 선택할 수 있도록 했다.

 

그런데 이는 예술인의 노동자성을 인정했던 2009년 정병국 의원, 서갑원 의원, 2011년 최종원 의원, 2013년 최민희 의원 등의 예술인 복지법안보다 후퇴한 것으로, 자영업자 기준의 임의가입 방식은 이미 실패가 증명되었다. 문재인 정부는 예술현장에 대한 충분한 실태조사도, 고용보험에 대한 현장예술인들의 요구조사도 없이, 바로 이 헌 정부의 낡은 정책을 그대로 발표했다.

 

이에 2017817,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는 정책포럼 [예술인들은 어떤 고용보험을 원하는가?]를 개최, 촛불 정국 광장에서 만난 10여 개 장르 50여 예술인들과 함께 장르별 실태를 공유하고 대안을 고민했다.

 

정책포럼에서 발제를 맡은 목수정 전 민주노동당 문화담당 정책연구원은, 이직 전 36개월 동안 12개월 가입 조건은 젊은 예술인의 진입 가로막는다는 점, 고용보험 가입을 의무가 아니라 선택에 맡김으로써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사이의 상호부조 및 연대정신을 포기하고 있다는 점, 예술인의 노동자성을 인정하지 않고 사용자측이 보험금 분담을 하지 않도록 함으로써 노사 협력 가능성과 문화예술산업 내 부의 재분배를 차단한다는 점 등을 비판했다.

 

장르별 현장 예술인들과의 토론 결과, 예술인 고용보험제도가 실효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예술인의 노동자성 인정, 노동시간에 기획 및 연습 시간 포함, 사용자의 보험료 분담, 수급자격요건 수정, 당연가입 등의 수정이 필요하다고 의견을 모으고 대책위원회를 구성하게 된다.

 

문화예술노동연대는 이 대책위원회를 모태로 941차 대표자회의 개최하며 탄생했다. 이후 문화예술노동연대는 문화예술인 노동자선언(919), 수차례의 예술인 고용보험 정책워크숍, 예술인들은 어떤 고용보험을 원하는가라는 동명의 국회토론회(927)를 개최하며 문체부를 호출했다. 문화예술노동연대는 112일 문체부와 첫 간담회를 열었고, 이후 현장의 요구안을 토대로 정부와 지속적으로 협의를 이어 갔다. 동시에 사용자 단체를 포함한 문화예술계와 수차례 간담회와 공청회를 진행했을 뿐만 아니라, 고용노동부가 구성한 고용보험제도 개선 TF의 노동계, 공익계 위원들과 간담회를 열어 예술인 고용보험과 관련한 현장의 요구를 반영하기 위하여 1년 여 동안 분주히 활동했다.

 

그 결과, 201875일 예술인 고용보험 도입을 위한 국회토론회를 거쳐 고용노동부가 발표한 고용보험제도 개선안은 아래와 같다. 1년 전 문체부가 발표한 예술인 고용보험 계획안에 대한 수정 요구가 대폭 반영되었다.

 

예술인 고용보험은, 기존 고용보험에 가입할 수 있었던 노동자와 자영업자 외에, 용역계약을 통해 일하는 프리랜서 예술인을 대상으로 당연 적용한다. 보험료는 예술인과 사용자가 공동 부담하며 임금노동자와 유사한 수준으로 부담한다. 우선은 실업급여와 출산전후휴가급여 지급부터 시작하고, 고용안정이나 직업능력개발 사업은 추후 적용을 검토한다. 실업급여는 이직 전 24개월 동안 9개월 이상 보험료를 납부한 비자발적 이직자 및 일정 수준 이상의 소득감소로 이직한 자에게 지급한다.

 

그리고 201811월에는 이러한 내용을 담은 고용보험법과 고용산재보험료징수법 개정안이 한정애 의원에 의해, 12월에는 예술인복지법 개정안이 안민석 의원에 의해 발의되었다. 문체부는 현재 개정안 통과 시 일정대로 예술인 고용보험을 시행하기 위한 준비 과정을 밟고 있다. 현재 예술인 고용보험 세부적용방안 연구를 비롯해 각 장르별 문화예술계 용역 범위를 설정하기 위한 연구가 완료되었거나 진행 중이다. 2019826일 한국예술인복지재단 예술인복지위원회 사회보험확대소위원회를 배치, 예술인 고용보험과 관련한 사업과 논의를 이어가고 있다.

 

이 모든 과정이 1년이 넘는 기간, 광장에서 만난 예술인들이 흩어지지 않고 연대를 이어가며 만들어낸 변화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낯설었던 예술노동이라는 단어를 내 걸고 예술인의 노동권을 요구하고 투쟁하는 현장이 늘어나고 있다. 정권 교체에 만족하지 않고 현장이 직접 움직여 각 장르별 실태를 공유하고 이에 기초한 요구안을 만들어 내고, 예술계와 노동계, 문체부와 노동부를 오가며 만들어낸 성과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예술인에 대한 특혜나 시혜가 아니라 노동자로서의 보편적 권리의 보장과 강화라는 인식과 실천의 결과다.

 

문재인 정권이 공약한 대로 2021년부터 예술인 고용보험제도를 시행하자면, 올해 안에 고용보험법 개정안과 예술인 복지법 개정안들이 국회를 통과해야 한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개정안들은 여전히 국회 계류 중이다. 시인 출신 문체부 장관과 노동운동가 출신 노동부 장관이 물러난 빈자리는 관료 출신 장관들이 채웠다. 어쩌면 우리는 이 정권에서 구체적인 정책의 변화를, 세상의 변화를 이루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정책 생산에 개입하면서 예술인들은 새로운 과정을 만들어 냈고, 그 과정에서 노동자로서, 시민으로서 성장했다. 이 성장이 멈추지 않는 한, 우리의 광장이 닫히는 일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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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린

사진가이자 비평가이며 문화활동가이다. 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이며 문화예술노동연대 공동대표이자 문화민주주의실천연대 공동운영위원장으로, 문화예술인의 노동권 강화와 노동자시민의 문화권 강화를 위해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