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공공미술프로젝트⑧] 마지막_ 다시, 공공미술을 ‘제대로’ 말해야 한다
[이슈: 공공미술프로젝트 ①] 역대 단일 장르 최대 규모 지원사업에 대한 이상한 침묵
[이슈: 공공미술프로젝트 ②] 공공미술은 하청사업인가
[이슈: 공공미술프로젝트 ③]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책임: 서울시 공공미술 프로젝트 사례
[이슈: 공공미술프로젝트 ④] 공공미술의 공공성: 예술성과 대중성 사이
[이슈: 공공미술 프로젝트 ⑤]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안녕하신가
[이슈: 공공미술프로젝트 ⑥] 간주곡: ‘공공미술 프로젝트’의 이상한 기원- 예술인의 일자리를 만드는 ‘예술뉴딜’?
[이슈: 공공미술 프로젝트⑦] 간주곡: 공공미술이라는 제도화된 정책시장의 등장, ‘도시갤러리’에서 ‘서울은 미술관’까지 - 서울시 공공미술 제도화 탐구
여전히 미궁이다. 공공미술프로젝트는 2020년 6월에 정부의 추가경정예산에 따른 예술뉴딜사업으로 기존 마을미술프로젝트를 전국 모든 시군구에 시행하는, 국비 758.6억 원, 지방비 189.4억 원 등 총 978억 원이 사용된 역대 최고의 단일 장르 지원사업이다. 이 사실은 반복적으로 말할 가치가 있다. 들인 돈에 비해 ‘이야기’는 너무 부족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미술 전문잡지의 2020년부터 2021년까지의 목차 중 공공미술프로젝트나 그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에 대한 심도 깊은 논의를 찾기 어렵다. 한국언론재단이 제공하는 언론 검색 정보에서도 별도의 칼럼이나 비평문을 찾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다. 찾을 수 있는 것은 특정한 지역 프로젝트가 끝났다는 것을 알려주는 기관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기사들, 혹은 이런저런 갈등과 구설수를 전하는 기사들이 전부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게다가 해당 사업에 대한 평가를 수행한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역시 의아하긴 마찬가지다. 지난 해 2억 원의 예산으로 <공공미술 프로젝트 우리동네미술 사업 평가 및 사후관리 지원 용역>을 발주하였고 그동안 서울시 관련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수행한 바 있는 (주)아트컨설팅 SAC가 수행자로 선정되었지만 그 결과가 공개되어 있지 않다. 지난 2월 정보공개청구에 대한 답변은 3월 중에 최종보고서의 발간을 앞둔 평가 공유회 등이 진행된다는 설명이 있었지만 정작 한국문화예술위원회 홈페이지의 검색 결과 확인되는 사항은 없다. 단지 2009년부터 사업주관처를 옮겨가며 시행되어왔던 마을미술프로젝트가 새롭게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시행처가 되어서 공고가 게시되었다. 사업의 형식은 2020년 공공미술프로젝트 이전에 시행된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최대 1억 원의 국비를 지원하는 사업으로 3건 내외의 대상지를 선정한다는 것인데 5월에 신청이 마감되어 6월 결과 발표 후 진행될 예정이다.
이 사업은 2020년 결산과정에서도 논란이 되었는데, 2021년 4월 기준 (이미 사업이 종료되었어야 하는 시점이었다) 전국적으로 예산집행률이 27.4%에 불과한 것은 물론 사업을 총괄하는 문화체육관광부는 ‘지자체 여건에 따라 운영하기 때문에 사업추진과정은 고사하고 결과물에 대한 활용 현황 등에 대해서도 파악하고 있지 못하다’고 답을 했다(예산결산특별위원회 검토보고서 379쪽). 이런 상황에서 2021년으로 이월된 예산에 대한 결산이 확정되니 조만간 집행결과는 최종적으로 확인될 터다. 하지만 문제가 발견되어도 이미 사업을 수행한 지1년도 더 지난 시점일 것이고 돈을 환수하기는커녕 그 사이에 이미 철수하거나 철거한 것도 있는 상황에서 평가다운 평가를 하기에도 어려움이 있을 것이다.
왜 침묵하는가
이런 상황에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면 당연히 당사자들이 먼저 시작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부산 영도에서 들려온 ‘벽화를 지워도 되겠냐’는 질문은 매우 반가웠다. (이에 대한 참가 리뷰는 [문화정책리뷰]에서 다뤘다.*) 하지만 논란이 되었던 만큼 뭔가 변화가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렇게 보면 그 요란스러움은 터질 것이 터졌다거나 아니면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식의 비장미보다는 하지 말아야 하는 이야기를 꺼낸 것에 대한 소란스러움은 아니었을까 생각이 들 정도다. 유명한 외국작가의 작품이라는 알리바이와 공공미술이라고 해도 그 작품은 그 작가의 인격권에 우선적으로 속한다는 인식은 보였지만 정작 공공미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커녕, 공공미술로 이익을 보는 이들이 과연 누구인지에 대한 답도 찾을 수 없었다. 안타깝지만 왠지 모르게 참여한 모두가 어떤 거대한 자연재해의 부분적인 피해자임을 애써 호소하는 자리처럼 보였다.
그래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마을미술프로젝트 공모를 하면서 다음과 같이 내세우는 사업의 목적에 다시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지역의 사람, 역사, 지리, 문화, 정체성 등을 기반으로 한 장소특정적, 지역특정적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지원하여, 사람들이 모여 살아가는 마을이 예술을 통해 풍요로워지는 창조적인 예술마을 만들기 지향
- 2개년 마중물 사업(2022-2023년)으로 지역 및 대상지 연구, 주민 교류 소통, 아카이빙, 비평, 주민 도슨트(해설사), 사후 프로젝트 지속 유지·관리·활용 등을 포함한 모든 물적/비물질적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지원하여, 지역을 주제로 다양한 창작 활동이 가능한 시각예술가 중심 참여 도모
- 지역주민이 문화예술 향유자나 대상자로서만이 아니라 공동 창작자, 주요 협력자, 핵심 정보제공자, 마을미술 도슨트(해설사), 지속가능한 관리자 등 주체로 참여하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를 지원하여, 예술이 마을에 상존할 수 있는 공공미술 사업의 지속가능성 추구”
오랫동안 공공미술 담론 속에서 반복적으로 언급된 ‘장소특정적’(장소성과 구분되는 지역성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역특정적’) ‘예술을 통해 풍요’ ‘창조적인 예술마을’ ‘물적/비물질적 공공미술’ ‘(모두가) 주체로 참여하는’ ‘지속가능성’ 같은 말들이 나온다. 다양한 이론적 논의에도 불구하고, 통상 장소특정적이라는 말은 미술작품이 놓이는 곳과 작품 간의 상호작용을 강조하는 말로 사용되는데, 권미원의 정의는 창작행위 자체가 제도와 맺는 관계로까지 확장된다. 하지만 2020년 공공미술프로젝트나 2009년 이후 마을미술에 대한 비평이 제공되지 않는 상황에서는 정말 그러한가라는 의문만 남을 뿐이다. 풍요니 창조니 하는 미사여구 역시, 그것을 사후적으로 확인하는 절차 자체가 없는 상황에서 말뿐이다. 그러면 ‘예술이 마을에 상존할 수 있는 지속가능성’의 경우에는 어떤가. 마을미술프로젝트 등 공공미술에 대한 유일한 사후보고서라 할 수 있는 2017년의 보고서는 전수조사를 표방했음에도 불구하고 2014년까지의 총 98개 작품 중 39개만 다뤘을 뿐이다.
공공미술 당사자들은 어떤가. 앞서 언급한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사후 평가 보고서의 중간보고 자료에 따르면 참여작가 만족도 조사는 666건이 회수되었고 지역주민 만족도 조사는 관람객 조사로 총 4건의 작품에 대한 것만 진행되는 것으로 나타났다(2022년 2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정보공개 청구에 대한 답변서에 따르면, 작가 설문은 693명, 관람객 만족도 조사는 1,100명으로 최종 완료된 것으로 보인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말한 693명은 전체 참여 작가 8,481명의 10%도 되지 않는 숫자다. 2021년 7월에 사업이 종료되었다고 할 때 종료 이후 불과 6개월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실시한 만족도 조사의 응답률이 10%도 되지 않는다는 것은 많은 질문을 남기지만, 적어도 여기서 ‘답을 하지 않을 권리’ 같은 이야기는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것만 분명히 하자. 공공미술프로젝트는 공모 사업이었고 그것은 공공재원을 통해서 특정한 목적의 창작활동을 하겠다는 선택이 수반되었음을 뜻한다. 그것은 재난 지원금과 같이 모든 예술인에 대해 대가 없이 제공하는 현금 급여가 아니라 반대급부가 따르는 계약 행위였고 공공재정을 통해서 공적인 장소를 배타적으로 활용하여 창작을 할 수 있는 권리 혹은 의무를 발생시키는 과정이었다.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참여자의 10%도 응답하지 않는 사후평가 보고서는 사후평가의 타당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점이다. (세부적으로 표본의 선정이 잘되었다면 모르겠지만 애당초 전수조사를 목적으로 했던 사후평가였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 지점에 한국의 공공미술이 장소특정적이니 관계미술이니 새로운 장르 공공미술이니 하는 이야기가 들어설 자리조차 없다는 것이 드러난다.
공공미술은 1.0 버전을 가진 적이라고 있던가
기존에 예술 사조가 놓인 맥락이나 사회적이고 역사적인 구조 속에서 예술을 해석하던 입장에서 벗어나 예술가 중심의 예술사를 정립한 곰브리치의 ‘절대적인 예술은 없고 예술가만 있을 뿐이다’라는 말을 비틀면, 공공미술은 공적인 미술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공적인 장소에 예술인이 창작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 뿐이다. 즉 창작공간이 공적인 장소일 뿐 사실상 개인 작업실의 연장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이 아니면 공공미술은 표절과 대중성 사이에서 오가는 키치적 작품이다. 어디서 본 듯하지만 그래도 다른 것이 비슷한 판본으로 복제되는 것을 벗어나지 못한다. 두 가지의 상황은 매우 다른 듯하지만 정작 예술가 당사자에게 ‘‘작품 목록의 한 줄이 되지 않을 가능성이 크다’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실제로 공공미술에 참여하는 작가들의 프로필은 특정한 지역의 활동 경력이 있지 그곳에 만든 작품명이 언급되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렇게 보면 공공미술은 그저 예술인의 일, 특히 시각예술인들의 일로만 보인다. 사업 초기에 외부 작가 비율을 둘러싼 갈등이 적잖았는데 이는 공공미술프로젝트가 시군구 단위의 예술인들을 위한 사업이라는 의식이 강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 장소특정성은 작품이 놓이는 맥락이지 예술인의 연고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상당히 우스운 논란이지만 정작 이에 대한 지적은 없었다. 그것은 아마도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지역마다 나눠서 가져가는 대규모 공공부조로 인식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겠다.
문화체육관광부는 공공미술프로젝트의 졸속 추진을 우려하는 언론보도에 대해 “코로나19로 작품 활동 기회를 잃은 지역 예술인들에게는 작가 생명과도 같은 작업기회를 제공한다”라고 반박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해당 기사의 우려는 실현되었지만, 문화체육관광부의 말은 실현되었는지 알 길이 없다.
물론 첫 단추를 잘못 꿴 것은 분명 문화체육관광부다. 공공미술프로젝트를 예술뉴딜의 수단으로, 코로나 추경에 담아서 시행한 것 자체가 틀렸다. 차라리 그 재원이라면 직업으로서 예술활동을 하고 있는 활동증명완료자 10만 명에게 100만 원을 일시에 나눠줄 수 있는 돈이다. (공공미술프로젝트 참여자 8,481명의 12배 정도 되는 규모다,) 문화체육관광부가 밝힌 문화예술 전체의 코로나19에 따른 수입과 고용 측면의 손실액이 1조 원 정도의 1/10에 해당하는 규모이며, 당장 손실액이 확인 가능한 예술인들에게 지급했다면 더욱 직접적인 혜택을 주었을 수 있는 재원이다. 그런데 이것을 특정한 장르의 진부하기 짝이 없는 사업으로 만들어서, 그것도 모든 시군구에 동일한 재원을 할당하고 강제로 집행시켰다. 갑자기 사용기한이 짧은 복권당첨금을 지급한 셈이니 이런 상황을 두고 공공미술의 철학이니 개념이니 하는 말은 헛도는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쉬운 것은 그동안 공공미술 담론을 이끌어온 공공미술의 원로들이나 중견 작가들 그리고 평론가 등 이론가들의 침묵은 이해하기 힘들다. 2019년으로 폐간된 『미술세계』는 2014년 7월호를 공공미술 특집에서 당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논의되던 공공미술 혁신 과정의 주요한 논의를 소개했다. 현재 서귀포문화도시센터장으로 있는 이광준 기획자는 「공공미술 2.0」이라는 글에서 “공원을 벗어나는 공공미술로서 공공미술 2.0”을 말했다. 같은 특집호의 기획좌담에서 모범사례로 언급된 안양공공예술프로젝트의 담당자는 “공공미술 측면에서 안양은 공공미술 2.0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홈페이지에서 소개하고 있는 291개의 공공미술의 작품들 중 77.6%가 안양예술공원에 집중되었고 평촌, 학운공원까지 포함하면 93%의 작품이 공원에 설치되어 있다. 이런 상황은 다른 지역도 크게 다르지 않다. 건축물 앞에 놓인 건축장식물 제도를 비판하면서 등장한 공공미술의 장소가 공원을 벗어나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광준 기획자는 앞의 글에서 당시의 공공미술에 대해 “작품의 질이나 수월성 측면에서 양적으로 공공미술은 늘어났으나 질적으로는 크게 나아진 게 없다”거나 “예술이 도구화되는 것이 아니라 상호작용 과정에서 긴장과 실험과 개입과 공감을 만들어야 하지만 실패하고 있다”라고 말하면서 당대에 퍼져 있던 공공미술의 성공이라는 평가를 비판한다. 달라져야 한다는 것이고,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그런데 그로부터 6년 후에 시행된 공공미술프로젝트는 과연 달라졌는가? [제주의 소리] 2021년 4월 5일 기사에 따르면 서귀포시 공공미술은 서귀포시 미협과 서귀포문화도시센터가 협업으로 진행했으며 10개 지역의 마을이야기를 담은 작품을 제작해 지역 내 경로당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여기에서 장소특정적이라는 공공미술의 특징은 소재의 측면으로 이해되고, 관계미술이라는 관점은 제작 의뢰와 납품의 과정으로만 보일 뿐이다. 공공미술 2.0을 설파했던 당사자가 실제 사업을 책임질 수 있는 자리에서 보인 것이 그렇다면, 이것이 한국 공공미술의 가장 최전선 아니겠나 싶은 것이다.
다시 공공미술로
이경창이 엮은 『비판 대 탈비판, 2000년대 현대 건축 논쟁』(아키텍스트, 2019)은 2002년 로버트 소몰과 사라 와이팅이 제기한 ‘비판적 건축’에 대한 비판에서 촉발된 논쟁을 소개한다. 건축이라는 것이 당대의 주류적인 가치에 문제의식을 던지는 역할을 여전히 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런 비판적 건축이라는 관념이 건축을 건축답게 만드는 기능적인 측면을 도외시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질문이고 실천적으로는 건축가의 기획으로서가 아니라 시장의 요구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혁신과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방식으로 제시된다. 미국에서 촉발된 논의가 유럽 대륙과 영국에 소개된 맥락과 반비판들의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이 책의 결론부에 해당하는 글을 쓴 할 포스터는 라투르와 랑시에르를 차용한 반비판의 경향들을 다시 비판하면서 “사회실천 예술에 대해 말하는 건 흔한 일이지만, 이런 이름은 예술이 일상생활과 얼마나 분리돼 있는지를 강조하는 동시에 그러한 간극을 메우고자 한다”(200쪽)고 말하며 비판이 가지고 있는 메타 비판적 성격을 강조한다.
이를 차용해서 보자면 공공미술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은 실패했고 어쩌면 한 번도 성공한 적이 없는 프로젝트일 수 있다. 이를 가장 분명하게 보여주는 사례는 2020년 공공미술프로젝트로 단기간에 천억 원에 가까운 자원을 전국에 균일하게 쏟아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예술적 파열음이나 혹은 풍요로움 조차 확인이 되지 않는다. 즉 미술의 공공성이란 것이 오로지 참여하는 예술인들에 대한 일시적인 부조로 끝나버린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미술이라는 단어는 한편으로 여전히 미술이 공공의 영역 바깥에 있다는 인식과 더불어 그것이 공공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따라서 2020년 공공미술프로젝트는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이 아니라 수없이 말해서 진부하게 만들어야 할 것에 가깝다. 이를 통해서 여전히 2000년대 초기에 만들어진 공공미술이라는 움직임이 내지 못한 파열음을 찾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지금의 공공미술에 참여하는 예술인들이 지역의 기득권을 가로지르는 무사의 모습이라기보다는‘없는 것이 없는’ (사실은 누구나 이질감 없이 적당히 만족할 수 있는) 물건의 품목을 가지고 있는 전국을 오가는 방물장수에 가깝다는 것을 직시해야 한다. 이것을 넘어설 수 있는 방법은 장르적 친밀감을 통해서 형성된 미술계의 폐쇄적인 인정구조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적어도 공적 영역에서의 활동은 공공성의 원래 의미와 같이 개방적open to anyone이어야 한다. 특히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열린 공공공간은 예술인이 아닌 시민들은 물건 하나 갖다 놓을 수 없고, 맘대로 놀 수도 없는 공간이라는 것을 고려해야 한다. 예술인이 연대해야 하는 대상은 한 지역의 예술인과 다른 지역의 예술인이 아니다. 오히려 지역의 다른 지역단체이거나 열려진 공간을 원하는 사람들일 것이다.
다음으로 사업으로서 공공미술과 미끄러지는 이념형으로서 공공미술에 대한 상을 지속적으로 말해야 한다. 그래야 행정의 편협함을 실패의 알리바이가 아니라 극복해야 할 문제로 인식할 수 있다. 도전받지 않는 행정은 현상을 유지한다. 행정의 혁신이란 아무리 빨라도 뒤늦게 나타날 수밖에 없고 그래서 사회의 혁신을 모방할 수밖에 없다. 이 말은 행정과 구분되는 의미에서의 사회에서 만들어지는 공공미술이 없는 한 행정에 의해 만들어지는 공공미술은 바뀔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 웨이웨이가 중국을 비판해 체포를 당하고도 풀려날 수 있었던 것은 미술작가로서의 명성 때문이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으로는 그가 중국을 비판할 생각이 있었고 그것을 실천에 옮겼기 때문이다. 예술인이 가질 수 있는 사회적 권력은 예술인이 보여주는 사회적 실천에 의해 만들어진다. 이건희가 마땅히 내야 했던 세금의 추징금으로 미술품이 등장했다. 아무리 현대의 미술이 사실상 화폐와 동일시된다고 하지만 이것을 당연시하는 것은 동시대의 예술을 어떻게 바라보는가와 직접적으로 닿아 있다. 한국의 대표적인 미술인 단체인 미술인협회는, 각 지역별 지회로 쪼개져서 지역 유치를 위해 애썼고 송현동으로 확정되자 이를 비난하는 입장을 냈을 뿐 미술품이 장물로 등장한 사건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예술은 돈이 아니다라든가, 예술의 가치를 경제적 가치로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이야기가 설 자리는 없다.
공공미술의 재구성은 사업이나 예산이 아니라 공공미술 자체가 관건이다. 공공미술에 대해 말하지 않고서는 공공미술-사업에 대해 다시 말할 순 없다. 그 말들을 기대한다.
* [리뷰] ‘이 벽화를 지워도 되겠습니까?’가 남긴 것 - 영도 공공미술 공론장 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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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문화연대집행위원. '밥먹고 예술합시다'라는 집담회를 계기로 예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인들의 공정한 보상과 문화산업 내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모임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창립에 참여했다.블랙리스트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혁신을 위한 TF 위원, 제1기 현장소통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문화/예술 재정과 예술활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