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법정문화도시 사업은 지역문화진흥법에 근거한 문화체육관광부의 국책사업이다. 윤석열 정부는 2023년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을 시작하며 기존에 진행되고 있던 5차 문화도시 지정을 폐기한 바 있다. 두 사업 모두 법정문화도시 사업이지만, 글에서는 편의상 2020년 시작된 1기 문화도시부터 2023년 사업을 개시한 4기 문화도시까지 24개 도시를 지정한 사업을 ‘법정문화도시 사업’, 2023년 윤석열 정부에서 시작된 문화도시 사업을 ‘대한민국 문화도시 사업’으로 구분해 지칭하기로 한다.
1. 대한민국 문화도시 선정 결과가 나왔다. 세종특별자치시, 강원 속초시, 대구 수성구, 부산 수영구, 전남 순천시, 경북 안동시, 경기 안성시, 전북 전주시, 전남 진도군, 경남 진주시, 충북 충주시, 경남 통영시, 충남 홍성군 등 총 13곳이 1차로 선정됐다. 이 도시들은 1년 후에 다시 최종 선정 '심판대'에 선다. 그러니까 몇몇 언론에서 표현한 것처럼 대한민국 문화도시로 ‘결정’된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 문화도시의 ‘후보‘로 선정된 것이다.
2. 13개 중 속초, 수영, 순천, 안동, 진주, 충주, 통영, 홍성 등 8개 도시가 문화도시 예비사업을 실행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예비도시 사업만 2년 또는 3년째 하게 된 도시들이 여럿 된다는 뜻이다. 순천과 통영은 예비도시 2년을 시행하고 최종 선정에서 탈락했던 곳으로 5차 법정문화도시 지원자격이 없었는데 기존 사업이 폐기되고 대한민국 문화도시로 사업이 다시 시작되면서 구제된 셈이다. 그런데 속초, 수영, 안동, 진주, 충주, 홍성은 선정의 문턱에서 기존 사업이 폐기되면서 극도의 혼란을 겪었다. 최종 결과를 앞두고 다시 예비도시 1년이 주어진 꼴이다.
3. 2023년 5차 법정문화도시 사업을 폐기한 이유는 예산확보와 사업기간 문제인 것으로 알려졌다. 법정문화도시 사업과 대한민국 문화도시 사업의 시기가 겹치면서 문체부가 기재부 설득에 실패했다는 것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이유다. 결과적으로 보자면 정부가 지자체들을 상대로 거짓말을 한 셈이 됐다. 정책의 가장 중요한 미덕 중 하나인 예측가능성과 신뢰가 실종된 것이다. 이는 문화도시 사업을 시작할 때부터 불거진 일이기도 하다. 법정 문화도시 지정사업에서 레토릭으로 사용되는 ‘최대 200억 지원’이라는 문구는 처음부터 가능하지 않았던 금액이다. 많이 알려져 있지는 않지만, 1차 선정도시들에 대한 예산지원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200억 원이 가능한 예산이 지원된 적이 없었다. 지금까지 최대금액은 문체부의 1년 예산은 15억 원, 여기에 지자체 대응투자금 15억 원을 포함해 30억 원이다. 5년간 최대 지원 예산은 150억이라고 하는 게 맞는 표현이다.
4. 더 심각한 것은 5차 문화도시 지정을 앞두고 일방적으로 사업을 폐기하면서 벌어졌다. 문체부는 탈락한 도시들을 달래기 위해 지원기준에 부합하지 않는 서울의 자치구들에 사업에 참여할 것을 권유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희망고문이 된 셈이다. 만약 서울의 자치구 중 선정도시가 나왔다면 그것 역시 거짓말이 된다. 최초 가이드라인에 배치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7개 도시를 지정해 예비기간과 본 사업기간을 운영한다는 것도 바뀌었다. 5차 문화도시에 참여한 도시들의 불만을 눅이기 위해 급하게 사업방향을 바꾼 것이다. 여러 가지 의미에서 원칙이 실종되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과연 앞으로 문체부의 사업을 믿어도 되나 싶을 정도다. 당장 대한민국 문화도시에 2천 600억 원을 지원하겠다고 발표한 내용을 액면 그대로 믿는 순진한 지자체가 있을까.
5. 권역별 선정이라는 면에서 7개 권역 중 하나인 제주를 탈락시킨 것도 석연치 않은 결정이다. 제주는 문화도시 예비도시 사업을 이미 2년 진행한 경력을 가지고 있다. 물론, 법정문화도시 사업과 대한민국 문화도시 사업의 결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1년의 예비기간이 더 주어진다는 것을 생각할 때 애초의 권역별 선정이라는 기준을 무너뜨릴 정도로 제주시의 사업계획이 부족했을까? 반면 충청, 전라, 경상 권역에서는 각각 3개 지자체가 선정되었다. 최종 선정도 아니고 예비도시 선정에서 어떤 권역은 아예 이 사업의 참여가 무산되고 어떤 권역은 세 개의 지자체가 본사업을 위해 경쟁하게 되는 이러한 선정 결과를 합리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6. 세종시는 광역이 아니라 충청권 쿼터를 적용받아 선정되었다. 물론, 이 내용은 애초에 공모요강에 나와있다. 세종시는 일종의 예외를 인정받은 셈이다. 그렇다고는 해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운 점은 남는다. 광역과 기초지자체가 동일한 선상에서 경쟁하고 있다는 비판은 이미 법정문화도시 사업 시행에서도 제기되었던 바다. 부산 영도구(1차), 인천 부평구(2차), 서울 영등포구(3차), 대구 달성구(4차) 등 광역시권의 기초지자체들이 여럿 선정되었다. 심지어 4차 문화도시에는 울산이 광역지자체로서는 처음 선정되어 혼란을 가중시켰다. 인구 4만이 채 안 되는 영월군과 인구 100만을 훌쩍 넘기는 광역시 울산이 동일한 조건에서 경쟁해야 하는 이상한 사업이었다. 물론, 인구소멸지역의 가산점이 있었고, 이후 인구소멸 위험지역에 한정해 시지역활력촉진사업이 만들어지며 이 사업에 참여하는 도시는 대한민국 문화도시에 지원을 할 수 없게 변경되었다. 하지만, 법정문화도시에서 대한민국문화도시로 이어지는 문화도시 사업의 목적 중 하나가 대도시의 문화적 인프라와 활력과 대비되는 지역의 열악한 상황을 개선하고자 했던 것을 생각해 보면 여러 가지로 원칙이 작동하지 않았다고 봐야 한다.
7. 대한민국 문화도시 조성계획이 승인된 지자체 13곳의 비전을 보면 이전 법정문화도시 사업과 달라진 기조가 뚜렷하다. 4차까지 선정된 도시들의 비전을 한 마디로 축약하면 ‘시민’이라고 할 수 있다. ‘시민의 문화자주권이 실현되는 문화독립도시 천안’(1차), ‘삶의 소리로부터 내 안의 시민성이 자라는 문화도시 부평’(2차), ‘시민이 낭만이웃으로 전환문화도시 춘천’(2차), ‘서로를 살피고 문제에 맞서는 문화도시 수원’(3차), ‘우정과 환대의 이웃, 다채로운 문화생산도시 영등포’(3차), ‘시민행동으로 빛나는 문화충전도시 영월’(4차), ‘시민을 기억하는 도시, 미래를 준비하는 시민, 머물고 싶은 숲의 도시 의정부’(4차) 등 시민성과 시민주체를 강조하는 슬로건들이 빼곡하다. 대한민국 문화도시에 선정된 도시들의 비전에는 경제, 성장, 세계, 콘텐츠, 접두사 ‘K’ 등이 두드러진다. ‘함께 만들고 배려하고 성취하는 문화경제도시, 수성’, ‘세계를 잇는 한글문화도시 세종’, ‘글로컬 문화콘텐츠 중심 도시 충주’, ‘영감으로 세계와 연결되는 문화도시 속초’, ‘전 세계를 사로잡는 K-전통 문화도시 안동’, ‘K-기업가정신으로 성장하는 문화도시 진주’, ‘긍정과 변화의 성장문화도시 통영’, ‘문화콘텐츠로 피어나는 정원문화도시 순천’, ‘대한민국 콘텐츠의 세계 도파민 WAVE, 민속문화의 수도 진도’ 등을 보면 사업의 성격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 있다.
8. 대한민국 문화도시가 이전의 법정문화도시에 비해 성과를 강조하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는 두 가지 측면에서 이야기해 볼 수 있다. 첫 번째는 법정문화도시 사업에서 시민을 강조하며 시민력을 키우고 거버넌스를 활성화하는 사업이 전국적으로 유행한 만큼, 시민과 관련한 이슈들은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았다는 판단 하에 그 토대 위에서 성과들을 도출해 낼 시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시민을 강조하며 시민주체를 만들어나가려는 노력 자체가 무용하다는 판단이 작동했을 수 있다. 이미 2022년 지자체 선거가 끝난 시점에서 문화도시 사업을 준비하거나 실행하던 많은 도시들이 이런 요구를 받은 바 있다. 당시 한 예비도시의 총괄기획자로 결합하고 있었는데, ‘시민들과 이야기하느라 예산을 헛되이 쓰지 말고 공연 전시 등 눈에 보이는 활동으로 서비스를 하라’는 지침을 받고 허탈했던 기억이 난다.
9. 문화도시 사업에 대해 가장 납득하기 어려운 비판은 이런 것이다. 200억 원을 시설인프라에 투자했으면 시설이 남아 이후에도 시민들의 문화활동에 큰 도움이 됐을텐데, 허공에 예산을 날려버렸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문화정책이 시민들에게 서비스를 늘리는 방식으로 정책사업을 펴 왔다면(문화의 민주화), 지금은 시민들이 주체가 되어 문화적 역량을 키우고 자발적인 활동을 북돋는 것이 주목받는 시대(문화민주주의)다. 물론, 이것을 기계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최소한 이를 위해 충분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만은 분명하다. 문화도시 사업은 시민주체라는 언뜻 불가능해 보이는 목표의 바탕을 다지기 위한 이례적인 마중물 사업이었다. 이를 두고 성과압박을 하기 시작한 순간부터 완전히 다른 사업으로 바뀌었다고 봐야 한다.
10. 2024년은 2020년 시작된 1기 문화도시들이 마지막 사업을 펼치는 해다. 기존 법정문화도시들은 조직과 예산, 사업 차원에서 저마다의 출구전략을 모색하는데 분주한 시점이다. 대한민국 문화도시 사업은 현실적으로 기존 법정문화도시 사업의 출구전략으로 작동하고 있다. 자유와 연대에 끼워 맞춘 가이드라인의 엉성함부터 2027년이라는 대통령 임기에 맞춘 시기조정, 기존 사업을 무리하게 폐기하면서까지 추진하는 무모함까지 하나같이 사업이 추구하는 가치와는 동떨어져 보인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문화도시 사업을 통해 가장 두드러진 것은 지역문화재단의 일하는 방식의 변화와 문화적으로 훈련된 시민들의 출현이었다. 대외적으로 평가받는 사업의 성패와는 상관없이 문화도시 사업을 실행했던 조직의 실무자들은 지역과 관계 맺는 방식, 사안을 보는 시야, 업무 프로세스 등의 변화를 고백한다. 문화도시 사업을 매개로 지역활동, 문화활동의 매력을 느낀 시민들이 이후에도 지역에서 활동을 지속할 수 있는 토양이 꾸준히 만들어지기를 기대한다.
안태호. 본지 편집위원. 안태호.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사)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회 활동가, <컬처뉴스> 편집장을 지냈고 부천문화재단, 제주문화예술재단에서 일했다. 함께 쓴 책으로 『나의 아름다운 철공소』, 『노년예술수업』, 『생애 전환 학교』 등이 있다. 스무 살 무렵 빼어난 재능들에 주눅 들어 창작에서 도망친 후, 예술 동네 근처에서 얼쩡거리며 문화 정책과 기획 관련 일을 해 왔다. 장르를 가리지 않는 왕성한 문화 소비자가 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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