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지역문화 현장과 정책의 재구성 ⑦] 지역 기록문화운동, 관계의 발견을 통한 다정한 공동체 만들기(배은희)
편집자 주: [문화정책리뷰]는 20대 대통령 선거 이후 ‘새정부 문화정책 과제를 묻다’라는 기획을 진행한 바 있습니다. 새정부에 대한 제안이라기보다는 새정부 구성을 계기로 현단계 정책과제를 살피자는 기획이었습니다. 이 기획에는 100인의 예술가, 기획자, 정책연구자 등이 참여하여 현장의 구체적이고 다양한 과제를 제안해 주셨습니다. 이 기획에 대한 분석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진단과 제안에는 구체적 현장으로서의 ‘지역’에 대한 여러 관점이 드러납니다.
관련기사:[특집: 새정부 문화정책 과제를 묻다 ⑤] 분석-정책 관심도와 흐름,
[특집: 새정부 문화정책 과제를 묻다 ⑦] 분석-정책에 대한 관심과 흐름2)
‘지역문화의 현장과 정책의 재구성’은 지역예술과 지역문화의 현장에서 정책이 어떻게 작동되고 있는지, 현장에서는 어떠한 변화와 대응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정책의 작동에서 토대로서의 현장에 주목하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지원사업의 안이냐 밖이냐를 떠나 스스로 자신의 토대를 만들어가는 현장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정책의 재구성을 전하고자 합니다.
① 척박하기 때문에 연대로 성장해온 대구 독립영화 씬 _ 권현준
② 창작열, 동료의식, 지원기관의 노력_ 이승우
③ 지역문화예술정책은 지역에서! _ 강구민
④ 아산에서 예술하기_ 조혜경
⑤ 아산에서 예술하기 2, 예술인 복지증진 조례 제정 노력 무산 _조혜경
⑥ 지역에 뿌리를 두고, 음악하기 _배미나
‘아카이브(archive)’ 또는 ‘아카이빙(archiving)’이라는 말이 ‘대유행’하고 있다. 8년 전 처음 기록학 공부를 시작할 때만 해도 아카이브라는 단어는 읽는 것부터 낯설어 동료들 내에서는 아카이브를 ‘어취브(achieve)’로 읽지 않는 날까지 아카이브를 알려야 한다는 농담도 있었다. 그랬던 용어가 몇 년 사이에 여러 곳 특히 도새재생 또는 문화 현장에서 종종 쓰이게 되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들어 내는 기록은 보통 ‘레코드(record)’라고 부른다. 공공기록에서는 30년 이상 된 기록을 여러 기준으로 평가하여, 영구적으로 보존할 만한 가치가 인정될 때 그 기록은 비로소 아카이브가 된다. 영구적으로 보존할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시설 또한 아카이브라고 부른다. 그러나 작금의 용법은 기록하는 행위를 아카이빙이라고 하고, 그것을 모아 책자를 만들거나 전시를 하면 아카이브를 했다고 칭하며, 예전에는 결과보고서라고 불렀던 걸 아카이빙북이라고 한다. 조금 어리둥절하고, 맘 한편이 불편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각자가 나름대로 남겨야 할 기억으로 생각하고 뭔가를 만들고 있고, 그중에 멋진 아카이브 또는 아카이브가 될 자료가 발견되기도 하니, 잘 보존만 된다면 시민의 힘으로 국가가 남기지 않는 기록을 남기는 문화가 형성될 거라고 긍정적 기대를 해본다.
빨간집은 부산에서 활동하는 기록 활동가들의 공동체이자 소기업이다. 대표인 나는 부산민예총에서 발행하는 잡지의 편집위원회 일을 그만두고 뭘 해야 할까 고민하면서 중 부산민언련의 마을미디어 양성과정 프로그램에서 ‘마을기록’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더 알아보다가 그해 겨울 ‘기록관리전공’의 대학원에 들어가게 되었다. 뭘 배우는 덴 지는 모르겠지만 학과 이름에 ‘기록’이라는 말이 들어가니, 지인들이 부산 청사포 해녀 인터뷰와 흰여울문화마을 주민인터뷰를 해서 책을 만드는 작업을 맡겨 주었고, 이 일들이 지금 우리가 하는 활동의 단초가 되었다. 또한 잡지 편집 경험을 통해 책을 만드는 일을 좋아한다는 걸 깨달았고 조사와 연구 영역이 중심이 되고, 그 결과물로서의 책, ‘기록을 한’, ‘기록에 대한’ 내용의 책을 만드는 회사로 정체성을 다지고 있기도 하다. 처음에는 1인 기업으로 프로젝트가 있을 때마다 팀을 꾸려 진행했으나, 일상적으로 고민과 일을 나눌 동료가 목말랐다. 그럴 때 선물같은 사람들이 나타나 현재는 나를 포함해서 세 명의 활동가이자 연구자가 활동 중이다. 젠더활동가, 문학치료전공자, 상담사, 전 소설가 지망생, 건축해설가, 기록관리 전공자, 잡지 편집위원회 출신 등 많은 정체성이 이 세 명에게 담겨 있는데, 모두 기록하는 일에 도움이 된다.
우리는 인터뷰와 자료조사 방식을 결합하여 지역을 기록하고, 책으로 결과물을 만드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때때로 사료 수집과 정리, 시민기록활동 지원 등의 일을 하기도 한다. 내용은 마을기록이 다수고, 이따금 주제기록(부산의 촛불집회, 구포국수 등)을 포함한다. 대부분의 활동은 기초자치단체, 문화기관 등에서 용역을 받아서 하는 일이라 기록의 대상을 우리가 선정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은 있다. 하지만 워낙 지역, 특히 마을과 시민의 생활사에 대한 기록이 전무한 상태에서 기록이 시작된 것이 불과 10여 년밖에 되지 않았으니, 예산이 편성되었을 때, 기록할 수 있는 만큼 열심히 해보자며 활동하고 있다. 또한 자기 단체의 자료들을 정리하는 데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개인기록 프로그램을 제안하는 기관이나 단체에서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한다. 기록의 영역과 형태는 그만큼 다양하다고 볼 수 있다.
기록 사업은 정부와 지자체의 도시정책 또는 문화정책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다. 국가와 중앙의 시선으로 지역을 기록하던 시대를 지나 지방자치와 분권이 강조되면서 지역민의 관점에서 지역의 전문가가 지역을 기록하고 연구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지역에서 마을로 정책의 범위는 좁아지고, 주민자치를 강조하며 주민이 직접 자기 마을을 기록하는 사업이 유행처럼 번지며 기록의 주체가 확장되기도 했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도시재생사업이나 문화도시 사업의 프로그램으로 발현되었고, 문화원과 도서관, 복지관 등에서도 시민이 참여하는 기록활동 자체를 하나의 콘텐츠로 활용하는 상황이다. 그에 따라 우리도 마을기록의 경험을 축적하게 되고, 그 경험을 시민들과 공유하면서 시민이 직접 기록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역할을 갖게 되었다.
지역 기록을 통해 알게 된 것들
이전 세대와 달리 거주지 이전이 잦은 시대에는 작은 단위의 마을이 아니라 ‘부산’이나 ‘대구’와 같은 지역명을 고향이라고 부르게 되어,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 진달래”가 피는 산골이라는 구체적인 형상으로 고향을 말할 수 없게 되었다. 대신에 고향은 내가 아는 이야기보다 모르는 이야기가 더 많은 곳이 되어버렸다. 부산이라는 도시는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산복도로, 해양관광지, 불꽃축제 등으로 대표되는 이미지와는 별개로 많은 이야기를 품고 있다. 오랫동안 그 마을에서 살았던 이들은 자신의 기억과 경험을 말을 통해 전해주었고, 우리가 몰랐던 이야기를 기록으로 남길 수 있게 해 주었다.. 청사포 해녀들은 부산이 고향인 분들인 반면, 영도 해녀들은 남편의 일자리를 따라 제주에서 온 이들이고, 기장의 어느 마을의 해녀들은 부산에 정착하게 된 제주 출항해녀, 제주 밖의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로 원정 물질하러 나간 해녀였던 어머니의 뒤를 이은 2세대라는 차이를 알게 되었다. 또한 일제 강점기 일본인 노동자들을 위해 지은 철도관사의 흔적이 일부 남아 있는 마을에서는 평수가 넓었던 관사 건물이 88올림픽 시기 부동산 규제가 풀리며 업자들에 의해 재건축을 하게 되었고, 그래서 빌라가 많은 마을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마을에서는 몇 대에 걸쳐 이어온 마을공동체 조직이 지금까지도 마을의 당산제를 지키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새마을운동이 잘 되었다는 문헌이 남아 있는 마을은 KTX가 생길 무렵 철도 노선이 마을을 둘로 나누는 계획에 반대하며 더는 국가정책에 희생만 당하지는 않으려고 했다는 저항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지역에 살면서도 ‘촛불집회’ 하면 광화문이라는 장소와 그 이미지를 떠올렸으나, 고유한 지역 촛불집회만의 서사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부가적으로 자기 일이 천하다고 생각했던 해녀는 이에 관심을 가지는 젊은 세대를 통해 위로를 받기도 했고, 엄마의 인터뷰 내용을 읽고 자신도 처음 알게 된 엄마의 시간을 기록해 준 것에 감사 인사를 하기도 했다. 이 이야기들이 당장 살아가기 바쁜 이들에게는 몰라도 그만일 수 있고, 지역의 콘텐츠로만 일회적으로 활용될 수도 있지만, 우리가 앞으로 살아갈 미래를 위해 과거를 돌아보고 지혜를 찾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필요한 일이고, 세대 간의 소통으로 가능한 일임을 매번 깨닫는다.
시민기록활동을 지원하는 사업에서 시민들은 내용과 형식에서 전문가와는 다른 결의 기록을 만들어 낸다. 평소에 궁금했던 같은 지역의 공동체 활동가와의 인터뷰에서 질문을 받는 이 또한 인터뷰 과정에서 자기 활동의 가치를 발견하기도 했다. 단순히 음악교육 학원인 줄 알았는데,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는 아이들의 마음을 다루고 성장할 수 있게 도운 선생님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시민도 있고, 무연고 어르신의 손을 사진으로 남기며 그들이 젊은 시절 얼마나 치열하게 살아왔는지 발견한 사회복지사도 있다. 노을이 좋고, 산책하기 좋은 여행지를 주말마다 찾아 나섰는데, 바로 우리 마을이 노을 맛집이었고, 자연과 생태가 잘 보존된 곳이라는 것을 깨달은 주민도 있었다.
사진으로, 글로, 그림으로 표현한 시민의 기록물은 사실 전문가가 만들어 낸 결과물보다 볼품이 없을 때도 있다. 그러나 시민기록활동은 자기 마을의 역사적 사실과 증거들을 찾는 것보다는 자신이 사는 곳이 어떤 곳인지, 어떤 이웃이 함께 살고 있는지 깨닫는 ‘관계의 발견’에 더 가치가 있다. 이는 소외되는 이 없이 사람 간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다정한 공동체를 만드는 것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기록활동을 경험한 시민이 지속해서 활동하면 전문가 못지않은 시민기록자로 성장하게 될 가능성도 보았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기록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기록문화운동’이라고 지칭하고 중요한 영역으로 보고 있다.
국가사업은 지속되지 않아도
이러한 기록의 기능과 역할에도 불구하고 앞서 언급했듯이 공공기관 용역사업의 한계가 있다. 지역의 역사문화자원을 다음 세대로 전승하기 위해 기록하고, 결과물로 만든 책자는 구청장이 손님들에게 주기 좋은 선물로 잘 활용되고 있다는 피드백을 받거나, 마을의 아픈 역사가 담긴 오래된 주거지를 볼거리로만 소비하는 데에 일조하는 콘텐츠로 쓰이는 현장을 목격하고 허탈할 때도 있다. 문화도시 사업으로 자기 지역의 기록자가 된 부산 북구와 영도구 시민들은 도시정책과 문화정책이 바뀌면서 사업이 종료된 것에 아쉬움만 크게 내비칠 뿐이다. 지속가능성을 외치던 국가사업은 입맛에 따라 언제고 나타났다가 사라져 오히려 지속을 저해하는 방향으로 가기만 하는 것은 아닌지 싶다.
지난 역사를 경험한 세대들이 점점 사라지고, 도시는 빠르게 변화하고 있고, 지역소멸이 큰 문제로 떠오른 시기에 지역기록 사업은 당분간은 계속 생겨날 것 같다. 최대한 국가나 정책입안자의 관점이 아닌 지역민과 주민의 관점에서 서술하고,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지점을 강조하는 방향으로 기록하는 것이 우리의 소임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난겨울부터 마을공동체 구성원들과 기록관리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20년 이상 된 공동체들은 그동안에 축적된 자료들을 정리하고, 아카이빙 하고 싶은 요구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여건상 당장 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해, 올해부터 만드는 자료라도 유실되지 않게 정리하고 모든 실무자와 회원들에게 공유할 수 있는 관행을 만들자는 취지로 진행하고 있다. 우리도 이러한 요구는 몇 해 전부터 계속 확인해 왔지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연구가 필요한 상황이라 강사료 없이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해보려고 했는데, 공동체에서 어디선가 예산을 마련해 와서 강사의 수고에 보답해 주었다.. 이외에도 마을 주민과 함께하는 기록사업에 대해 일상적으로 아이디어를 내보기도 하고, 문화도시 사업에서 연결된 시민기록자들의 모임을 만들어 서로의 기록활동을 독려하자는 의견을 듣기도 한다. 시민기록의 지속가능성은 이렇게 기록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이들에 의해서 담보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SNS로 기록이 일상화되고 있는 지금, 가치 있는 기록을 남길 수 있는 주체들을 더 많이 만드는 것이 우리의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지역기록이든 단체나 개인기록이든 다양한 형식으로 접근하고, 이러한 기록이 쌓이면 지역을 입체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자료가 될 수 있을 것이라 기대한다.
배은희. 부산에서 기록하고 책 만드는 ‘빨간집’ 대표이자, 기록활동가이다. 기록하며 지역을 계속 알아가고 있다. 오늘도 어딘가에서 틀어박혀 인터뷰 자료를 정리하며, 내일의 재미난 기록을 꿈꾸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