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특집: 2025 대선 ⑩]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77인의 외침!”

CP_NET 2025. 6. 2. 08:13

 

편집자 주: 긴 탄핵정국이 끝나자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곧 각 정당의 후보자들의 선거 유세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선거는 후보자들의 경합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선거는 정치적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며, 후보자들은 마땅히 그러한 요구들을 속에서 경합해야 합니다.

[문화정책리뷰]는 제21대 대통령선거를 맞이하여 ‘특집:2025대선’을 마련했습니다. 후보자들의 약속에 갇히지 않고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의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프롤로그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20인의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① 프롤로그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20인의 외침!”
② 잊혀진 문화헌장을 다시 들추며 (염신규)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32인의 외침!”
④ 2025예술인선언 “우리는 선언한다, 우리의 삶과 예술을 위한 사회를”
⑤ 개혁이 면죄부가 되는 이유- 공적 도구의 이념을 묻는다
⑥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44인의 외침!”
⑦ 사회를 회복시키고 우리의 삶을 살리는 길-‘사회정책으로서의 문화정책’과 ‘연대’를 위하여 (손동혁)
⑧ 흩어져 있거나 기반 조성에 묶여 있거나- 문화예술분야 공약 리뷰 (김민규)
⑨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59인의 외침!”
⑩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77인의 외침!”[끝]

 

 

이 땅은 모든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감정원_ 팔현습지를 지키는 예술행동

저는 30대 중반, 여성입니다. 대구에 살고 있고 독립영화를 만듭니다. 스무 살부터 영화를 찍어왔습니다만 그러다 말고 지금은 환경 활동에 몰두하고 있습니다.

강과 땅, 생명을 뒤집어엎어버리는 금호강 르네상스 사업은 제가 태어나서 들은 단어 중에 가장 르네상스 답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인간성 해방도, 문예 부흥도, 문화 혁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멋지고 아름다운 단어를 갖다 붙이면 모든 그럴듯해 보일 것이라 판단하는 일부 결정권자들의 선택과 제안이 참으로 한탄스럽습니다. 미래세대의 삶의 터전이 될 이 땅을 그저 돈으로만 바라보는 생각들, 매우 폭력적이지 않습니까?

생이 존재하는 곳들을 상품으로 만들며 확장하고, 땅을 짓밟고 부수는 결정에 동의하십니까? 이 땅은 모든 순간을 기억할 것입니다. 그리고 잊지 않을 것입니다.

 

 

“한강과 비상계엄”

강성훈_ 서점 자영업자

2024년 10월 10일, 한국 시간 저녁 8시에 스웨덴 한림원은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작가 한강을 선정했다. 스웨덴 한림원은 “역사적 상처에 직면하고 인간 삶의 취약성을 노출하는 한강의 시적 산문”을 선정 이유로 밝혔다. 그리고 2024년 12월 3일 밤 10시 30분에 윤석열 씨는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책을 좋아하는, 아니 책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한강 작가의 수상은 모두에게 축제였다. 하지만 그 축제는 두 달을 넘지 못했다. 한순간에 싸늘하게 식었다. 책을 파는 자영업자 입장에서 이 둘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도저히 알 수 없었다. 한강 작가는 역사적 상처에 직면한 인간의 고통을 이야기했는데, 불과 두 달 후 윤석열 씨는 국가 권력을 동원해 거대한 폭력을 국민에게 행사하려고 했다.

이제 곧 제21대 대통령선거다. ‘대만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우리가 세운 진리다. 그리고 그 진리를 지탱해 주는 것은 문화다. 윤석열 씨에게는 문화가 없었다. 그렇기에 국가 권력이 자신에게서 나온다고 착각했다. 책을 파는 자영업자의 입장에서 이번 선거의 기준은 문화다. 누가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진리를 지탱하는 문화정책을 만들 것인가?

 

 

“지역 시각디자인업 종사자들, 우리는 왜 더 가난한가?”

구민호_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구김종이 대표

부실한 지역 디자인 생태계
지역에서 디자이너로 살아가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지 않다. 다양한 문화단체가 기민하게 움직이고, 기업이 있고 또 거대 자본이 있는 수도권과는 다르다. 이곳의 시각디자인 일은 대체로 지자체나 지역 공공기관들, 공기업들, 그리고 지자체의 지원금으로 운영되는 여러 문화단체들에 의해 생겨나는데, 당연히 지자체의 정책 방향이나 예산에 크게 좌우된다. 지난 몇 년간 대구시는 문화사업에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았다. 명목상으로는 코로나 시국에 늘어난 부채를 상환하기 위함이라고 하지만, 문화 사업에 할당해야 할 예산을 줄여 동상을 만들거나, 프러포즈 공원을 조성하는 등 표심을 얻기 위한 혹은 성과를 과시하기 위한 보여주기식 행정에 지역 예산을 끌어다 썼다. 대구시의 그러한 태도는 결국 지역 문화를 위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일거리가 눈에 띄게 줄어들었고, 같은 일을 해도 이전과 비교해 확연히 차이가 나게 적은 비용을 받는다. 대구에서 시각디자인업을 하는 우리는 빈약해져 가는 통장 잔고에, 그리고 지역 문화 예산과 지원금에 기댈 수밖에 없는 부실한 지역 디자인 생태계에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

수도권에 비해 턱없이 적은 일거리, 그마저도 진입 장벽이 높다
디자인 회사가 공공기관과 일정 금액 이상의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서는 '인쇄 직접 생산 확인 증명'(인쇄 직생)을 해야 하는데, 상대적으로 사업 규모가 작은 지역의 젊은 디자이너들에게 이 인쇄 직생은 큰 장애물이다. 애초에 공공기관이 인쇄소가 아닌 디자인 회사나 디자이너에게 인쇄물을 직접 생산했다는 증명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공공기관의 디자인 업무 이해도 부족을 시인하는 꼴이다. ‘인쇄 직생을 위해서는 인쇄기와 인쇄 담당 직원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하는데, 지자체의 방침에 따라 필요한 인쇄기의 성능과 가격대가 조금씩 다르다. 인쇄업이 발달한 대구는 여타 지자체에 비해 증명이 까다롭고 구비해야 하는 인쇄기의 성능과 가격대도 높다. 결국 이득을 보는 건 디자인 업무를 커버할 수 있는 인쇄소들이다. 공공기관은 계약 조건을 쉽게 충족할 수 있는 인쇄 업체들과 일을 하고, 디자인 수익에 별 관심이 없는 인쇄 업체는 골치 아픈 디자인 비용을 없애거나 줄이는 방법으로 공공기관과 쉽게 타협한다. 그 과정에서 지역의 디자인 수준과 디자인 비용은 점점 낮아진다. 많은 젊은 디자이너들이 이 허들을 넘지 못하고 직업을 바꾸거나 거주하는 지역을 바꾼다.

같은 일을 하는데, 왜 지역에 사는 우리는 더 가난해야 하나?
먹고사는 일이 해결되지 않으면 어떤 문제도 해결할 수 없다. 지역의 젊은 디자인 인구 유출은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지역의 시각디자인 생태가 지자체의 문화 예산과 문화정책에 쉽게 좌지우지되는 만큼, 지역의 디자인 생태를 개선할 수 있는 열쇠 또한 지역 자치단체가 쥐고 있다. 시각디자인이라는 영역에 대한 공공기관의 이해도를 높이고, 잘못된 관행을 바로잡고, 지역 문화 사업에 대한 예산과 정책을 늘려야 한다.

 

 

“대구문화예술 ‘진흥원’이 아니라 ‘진공’이다 – 문화정책, 리셋이 필요하다”

김미련_ 로컬포스트 대표, 공간리상춘 공동대표

진흥원 출범 3년, 바뀐 건 이름뿐이다. 예술가는 행정의 수혜자로 전락했고, 정책은 정치에 종속됐다. 전문 인력은 이탈하고 현장은 침묵했다. 지금 필요한 건 시스템의 리셋이다. 예술가 주도 정책설계, 문화노동 권리 보장, 독립적 문화위원회, 정책실험실, 축소된 공모와 예산의 회복이 절실하다. 문화행정도 대전환이 필요하다.

 

 

“불평들”

김월식_ 아빠 시민 작가, 무늬만 관장

2025년 현재 여전히 공공예술에 대한 정책과 지원은 공공성에 대한 질문이 없고 공공에 대한 예의도 없다. 공공함의 사회적 컨센서스가 공공한지에 대한 질문으로부터, 개인의 삶을 살아내는 것의 미시적 정치적 행위가 왜 공공을 향하고 있는가에 대한 질문도 없다. 그것이 우리가 생활의 현장에서 열심히 그리고 치열하게 일하다가 뛰어나가 들었던 촛불 같은 공공성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로서 필요한 질문일 터.

잠시 생각을 해보니 비슷한 이유로
관제형 공공 예술이란 늘 이런 질문이 필요하다. 정책과 지원의 윤리적 태도야 말로 공공 예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처음이자 과정이고 그 끝이다. 예술가가가 무엇을 다루던.

시민참여형 공공예술은 선민적 복지적 정책 예산이 만든 가이드라인을 넘어서는 위법과 위반을 허용하지 않는다. 색칠공부의 선에 갇힌 시민의 상상력과 실천력을 참여라고 부른다면, 자율성이란 허울 좋은 자기검열이 될 뿐. 하지만 우리는 이런 민주주의에서 사는 것을 너무 가스라이팅 당했다.

거리의 돌덩이 쇳덩이, 낙후된 골목의 벽화에 대한 공공성을 물으니 공공성은 슬그머니 시민과 주민을 볼모로 잡기 시작했다. 시민 참여형 공공예술을 명분으로 교육프로그램으로 둔갑한 공공예술은 체험형이라는 이름 아래 원데이클래스처럼 우아한 키트를 양산하기 시작했다. 시민의 수혜성을 강조하며 공공예술 코스프레를 하면서, 역시 공공에 합당한 수혜자 수를 카운트한다.

공공한 예술은 공공예술 서비스업이 아니다
도대체 공공예술에 동시대의 삶이 없다. 지역성을 강조한 공공예술은 전통과 역사에서 그 내용을 가져온다. 늘 그런 식이다. 그런 방법은 지역을 리서치하면서 유일하게 자랑할 만한 상투적인 가치가 되었다. 그 가치 속에는 오늘을 사는 김 씨가, 박 씨도, 이 씨의 삶은 없다. 동시대 다양한 삶을 지우거나 소외시킨 공공예술은 전체주의의 표상일 뿐.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은 생활이 되어야 하고, 쌀이 되어야 하며, 자식의 학비가 되어야 한다. 예술과 삶을 살아내는 데 있어서 예술을 사용하는 것이 무엇이 부끄럽고 무엇이 잘못이 될까?

"본 사업은 문화체육관광부가 예술인 일자리 제공 및 주민 문화향유 증진을 목적으로 하며, 문화체육관광부와 ○○도가 주최하고 ○○시와 ○○문화재단이 주관하며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협력하는 공공프로젝트이다"

모든 공공예술 프로젝트는 사회적 역할과 성과, 기능적 효용성을 향하고 있다. 도대체가 자기 자신을 위한 이기적 마음이 없다. 공공의 선을 향하고 있는 예술의 혐의가 딱 이렇다. 이것이 첫 번째 혐의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으며, 왜 이것을 하는지 질문과 문제의식이 없다. 아니 없다기보다는 이미 답이 정해져 있다. 이 정해진 정답 때문에 공공예술의 혐의는 불온하다. 이 불온한 선동을 조장하고 복무한 문화체육관광부와 지자체와 예술가들은 모두 공범이다.

두 번째 혐의는 참여라고 불리는 관제적 동원력과, 사회적 약자를 참여 대상으로 하는 위계성이다. 타자의 삶에 무책임하게 개입하는 무지함, 관계성에 대한 막연한 이해가 전방위적 방향을 일방통행으로 만들어버리는 폭력. 이를 선한 영향력으로 만드는 기만적 행위. 참여자도 속이고 나도 속이고 사회도 속이는 이 기만이 어떻게 전국에서 동시 다발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지 그것도 놀라운 일이다.

프로그램을 위해 강제로 호명된 기억들이 소모된다. 이제 공공예술은 모두의 기억을 호명하여 소비하는 소비적 미학에 기반한다. 전국의 모든 할머니들은 서툰 글씨로 시를 쓰고 전국의 재래시장은 똑같은 아케이트 지붕과 주차장을 갖게 되었다. 걷는 속도를 참지 못하는 다급함을 공공성이라 부를 지경이다.

그래서 더더욱 공공함에 대한 공공한 예술에 대한 정책의 안일함과 도구화를 참을 수 없다. 예술(가)는 도구가 아니라 다양한 삶의 차이에 존재하는 주름 같은 것이다. 제발 이 주름의 뾰족함을 펴서 문화와 예술을 평평하고 밋밋하게 하는 멍청한 정책질을 부디 멈춰주길.

그리고 마지막으로 예술이 없는 세상에서 단 하루만이라도 살아봐!!”

 

 

"무너진 균형, 다시 피어나는 생태계"

김재원_ 문화예술기획, 10의n승 디렉터

우리는 대선을 앞두고 있다. 불과 며칠 전, 사회 전반을 뒤흔든 비상계엄 선포는 대한민국 모두의 심장을 뒤흔들었다. 이후 대통령 탄핵과 대선은 한국 사회 전반의 생태계를 모두 재편하게 되었다. 그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문화예술은 어떤 방식으로 살아남아 무엇을 잃지 않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의 기로에 다시 서있다.

자연생태계는 어느 한 요소가 사라졌다고 해서 즉각 무너지지 않는다. 일정 시간의 혼란과 혼탁을 거치면서 스스로 회복하고 공생, 진화하는 메커니즘을 가진다. 그러나 그 회복력은 무한하지 않으며, 포식자와 먹이의 균형에 맞선 빛과 그늘, 순환과 퇴적의 관계 속에서 유지되는 미묘한 균형의 자생력이 생긴다. 문화예술생태계도 마찬가지다. 예술가, 기획자, 기관, 관객, 정책, 교육은 서로 맞물려 작동한다. 탄핵과 같은 사회적 충격, 대선이라는 정권 교체의 파고는 이 생태계에 크고 작은 단절을 불러온다. 예산의 흐름이 바뀌고, 가치 체계가 흔들리며, 어떤 예술은 표면 위로 부상하고, 또 다른 예술은 사라진다.

우리는 매번 위기 속에서 새로이 적응해왔다. 근간 문화예술계는 시민 연대” “광장이라는 키워드를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정부는 문화복지산업화에 집중하면서 이전의 감성적 연대는 점점 제도화의 틀로 재편되었다. 생태계는 다시 균형을 맞추기 위해 몸부림쳤다. 지금 이 순간, 문화예술(교육)도 자신을 재조정해야 한다. 기후 위기, 지역 소멸, 감정노동의 사회화, 알고리즘 기반 콘텐츠 산업의 팽창에 맞서 여러 다양한 적응 방식을 늘려 조정할 것이다.

더불어 우리는 더 작고 느린 프로젝트, 공동체 기반 창작, 비정형 큐레이션, 생태 감수성 회복 등의 예술적 표현뿐만 아니라, 생존을 위한 생태적 전환의 자세를 가져야 한다. 생태계의 흐름을 읽는 방식으로, 장르의 편중과 과잉, 예술()의 소외, 타당한 의제화에 대한 감지를 해야 한다. 다시 말해 균형이 깨진 곳을 찾아내야 한다. 지나치게 트렌디한 프로젝트과 정책의 키워드를 무리하게 쫓는 문화예술(교육) 속에서 느린 회복력을 가진 로컬 기반 창작자들의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 그들이 마치 숲속에서 새롭게 뿌리내리는 자생식물과 같은 역할을 가져 틈새를 찾아 잘 자라도록 해야 한다. 그런 형태를 통해서 다시 문화예술(교육)의 생태적 역할과 집중의 현장이 발현될 것이다.

비상계엄과 탄핵이 남긴 심장 박동과 대선을 앞둔 불확실성 속에서 우리는 세상이 존재하는 세상의 작은 존재에서 생태계 전체를 한 번 더 돌아보아야 한다. 분명 회복의 원리는 파괴 이후에 작동한다. 문화예술(교육) 역시 스스로 갱신하며 다음을 위한 토양을 마련해야 한다. 그 토양은 거창한 국가정책이 아닌 작고 사적인 프로젝트와 비주류의 실험의 가능성과 지역 예술가들의 연대 속에서 비로소 비옥해진다. 이제는 다음 생태계를 준비할 때다. 질문은 간단하다. 우리는 무엇을 살릴 것인가?

 

 

"비전문가 미술관장은 이제 그만!!!"
김재환 _ 한국큐레이터협회장

한국 공공미술관의 역사는 이제 30년을 훌쩍 넘어섰다. 초창기 미술관 전문가가 없던 시절 유명 원로작가나 행정가 출신 공무원이 관장으로 활동하기도 했지만, 2000년 이후 미술관 운영의 전문성을 담보하기 위해 미술관 전문가가 관장으로 임용되는 흐름이 만들어졌다. 그러다 최근 몇 년 동안 행정직렬의 공무원이 관장으로 오거나 미술관 경험이 전무한 미술작가 출신이 관장으로 임용되는 사례가 전국에서 다시 발생하면서 공공미술관 운영의 전문성이 위협받고 있다.

미술관의 설립 근거가 되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따르면 미술관은 일반 공중의 문화향유와 평생교육 증진에 이바지하는 대중적인 공간이면서 미술 자료를 수집(관리,보존)하고 연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전시는 물론 교육까지 시행하는 전문적인 기관이다. 그래서 미술관 운영의 총책임자인 관장은 사회적 의제를 설정하고 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인문학적 지식을 겸비하고 있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미술관 구성원들과 함께 구체적인 수행 방향을 만들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미술관에서 실현하려는 전문성 기반 대중화 전략은 말이 쉽지 미술관 운영이나 연구 경험이 없는 사람이 수행하는 것은 사실 불가능에 가깝다.

이제는 박물관 및 미술관 진흥법에 국공립미술관장의 전문성을 명시하고 이 전문성이 미술관 연구와 운영의 경험에 근거해야한다는 조항을 만들어, 미술관 운영의 독립성과 전문성을 제도화해야 한다. 이러할 때 미술관이 공중의 문화향유와 평생교육 증진에도 적극적으로 대응할 수가 있을 것이다.

 

 

“성소수자도 국민이다”

배미나_ 드링킹소년소녀합창단

12월 3일 윤석열의 계엄 이후, 헌재의 탄핵 판결이 있을 때까지 광장에서는 수많은 집회가 이어졌다. 집회가 진행되는 동안에는 평범한 시민들이 무대에 올라 발언을 했고, 발언에 앞서 자신을 소개할 때 성 정체성을 숨김없이 이야기했다.

그러한 용기에 광장의 시민들은 많은 응원을 보냈고, 오랜 시간 사람들이 말해 오던 '차별금지법 제정을 위한 사회적 합의'는 이미 충분하다고 느껴졌다. 새 정부가 들어서면 차별금지법이 제정될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다.

며칠 전, 대통령 후보 공보물을 배송받았다. 조금은 설레는 마음으로 공약집을 펼쳐보았지만, 권영국 후보 외에는 어느 누구도 차별금지법을 이야기하는 후보가 없었다.

우리는 그렇게 또 나중에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재명 후보가 대구에 와서 연설할 때, "왜 재명이 보고는 '우리가 남이가안 해줍니까?"라고 하던데, 나도 묻고 싶다.
왜 성소수자 보고는 '우리가 남이가안 해줍니까?”
빨간 쪽도 파란 쪽도 모두 대한민국의 국민이라면서, '성소수자도 국민'이라는 말은 안 해줍니까?”

 

 

“문화시장 300조? 인문학과 순수예술은 어디에”

이경미 _ 독립기획자, PUBLIC PUBLIC 공동디렉터

서울대는 ‘수요 부족’을 이유로 마르크스경제학 강좌를 폐강했다. 서울대 경제학부 강사가 올여름 비정규 수업 형태로 개설하자 학생과 시민 2,000명 이상이 신청하며 큰 호응을 받고 있다. ‘서울대학교 마르크스경제학 개설을 요구하는 학생들’(서마학)은 “학문을 외주화 하는 대학의 현실”을 비판한다. 한 연구에 따르면 인문학 교원 수는 10년간 22.6% 감소했고, 2024년 신규 박사 중 인문학 및 문화예술 분야 무직 비율은 40.1%에 달한다. 인문학 연구자 소득은 이공계 대비 10분의 1 수준에 불과하다.

인문학과 순수예술이 자본의 논리에 잠식당하지 않으려면, 학문 다양성 보장과 제도적·재정적 지원이 절실하다. 많은 대선 후보가 K-컬처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문화산업 확대를 약속하지만, 실제로는 상업적 가치에만 초점이 맞춰져 있어 보인다. 이재명 후보는 “2030년까지 문화시장 규모 300, 수출 50조 달성을 목표로 내세웠으나, 인문학과 순수예술에 대한 지원은 공약에서 찾기 어렵다. 문화산업의 확대를 앞세우기 전에, 창의성과 비판적인 시각을 확장하며 대중문화의 기반을 만드는 인문학과 순수예술의 중요성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다.

 

 

“예술은 남았고, 예술가는 없다”

이상 (이상의 이상, 연출가)

우리는 예술을 향유하지만, 예술가의 생존은 외면한다. 전시장은 넘쳐나고 공연장은 북적이지만, 그 뒤의 노동은 비가시적이다. 하루 6시간도 못 자며 창작하지만 연 수입은 최저임금에도 못 미친다. 창작은 공기처럼 필요하다는데, 왜 그 공기를 만든 사람은 굶고 있는가? 예술이 계속되기를 원한다면, 이제는 그 대가를 말해야 한다. 예술이 공공성의 영역에 포함된다면 예술가들의 생존을 공공이 책임져야 한다.

프로젝트 연출가, 단체 대표는 사업주가 아니다. 이들은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예술가들과 함께 하나의 작업이라는 항로를 항해하는 동료다. 예술 작업은 노동이며 단체의 대표자와 프로젝트의 연출가를 포함한 모든 예술인들에게 근로기준법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리고 그것을 집행할 책임은 개별 단체의 대표가 아닌 공공에 있다. 지원사업 등으로 전개되는 프로젝트에 참여하는 모든 예술노동자에 대해 공공이 직접 근로기준법에 의거하여 사례비를 집행하고보험 가입 등의 행정절차를 집행해야 한다.  

 

 

“내가 그저 바라는 것은”

이상홍_ 시각예술가

제주시 관덕로3길 15 공간을 빌려 ‘아트스페이스 빈 공간’을 4년째 운영하고 있는 나는 시각예술가다. 나고 자란 서울을 떠나 8년째 제주에서 지내고 있는 나는 제주 원도심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어찌 보면 제주의 원도심 동네가 좋아서 제주에서의 삶이 결정되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사는 동네를 구제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신제주에 사는 사람이거나 제주에 놀러 온 사람이거나 신제주라는 도시 정책을 만든 사람일 테다. 음력설을 구정이라고 부르는 사람을 뭐라 할 순 없지만, ‘구정구제주는 뭔가 구리다.

조용하고 심심한 동네에 아트스페이스를 만들어 전시를 기획하고, 작가와 작품을 초대하고, 보다 재미있고 의미 있는 예술활동을 4년째 하고 있어서인지 문화예술 관련 정책을 만드는 혹은 문화예술을 정치의 수단으로 사용하는 정치인 또는 그와 관련된 이들로부터 원도심 문화시대에 대해 질문을 종종 받는다. 친하지 않은 그들의 질문은 대부분 그저 일차적이거나 듣고 싶은 대답만 듣고 싶어 해 그 자리가 유쾌하지 않기 일쑤다.

젠트리피케이션은 학교 댜닐 때 배우 사회현상이다. 그리고 이십여 년 전 시각예술가가 된 후 가장 많이 겪고 있는 현실이다. 제주도 원도심에서 점점 재미있게 동네 친구들과 지내고 있는 나는 그저 젠트리피케이션을 만나지 않기만을 바란다.

 

 

“로컬이 미래다 – 생태계를 구축하라”

장현정_ 호밀밭 대표

한국의 기형적인 ‘서울 중심’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건강한 사회를 이야기하기 어렵다. 각 지역이 가진 고유한 역사, 공동체, 언어, 감수성 등이 살아 숨 쉴 때 사회구성원들의 삶과 정신도 풍요로워진다. 하지만 지금의 제도와 지원은 로컬을 소비 대상으로만 바라보고 있다. 유행으로만 접근하고 천박한 사고로 당장의 성과에만 목매달고 있다. 로컬이 자생적으로 문화를 만들고 확장할 수 있는 조건을 마련하지 못하고 있다.

중앙정부는 지역이 주체가 되는 실험을 적극적으로 뒷받침하라. ‘사회적 파장’, ‘공동체 회복력등 질적 가치를 반영한 새로운 평가 체계를 도입하라. 다양한 지역의 선도적이고 실험적인 사례들이 정당한 평가를 받고, 그에 따른 인센티브를 받을 수 있도록 하라. 지역 간 예술가와 활동가의 교류, 공동 기획 등을 지원하라. 로컬 중심 문화정책으로의 근본적인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경주마가 아니다, 빈익빈 부익부 조장하는 편중된 지역문화정책을 되돌아볼 때”

전민정_ 지역문화활동가

인구 5만의 군소도시 문화재단에서 일을 해보니 문화재단을 통해 지역문화를 육성하고 활성화한다는 것이 쉽지 않구나, 이리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인가, 하고 느끼게 된다.

애초에 재단을 설립하는 목적 자체가 지역 내 광범위한 문화예술 관계자들의 중의를 모아서 시작되었다기보다 지자체장의 선거공약으로 또는 소수의 지역 내 문화권력의 구상에서 비롯된다는 점에서 재단의 불안정성은 이미 예견된 일이다.

또한 재단이 시군으로부터 받은 출연금이라는 재원이 적절하게 지역 내에 확산되고 있는가가 지역 내에서는 중요한 관심사이다. 그래서 취지와 목적이 분명한 문화사업도, 그리고 실제 좋은 효과를 보여주는 사업도 부의 재분배에 대한 의심이 생기기 시작하면 사업 자체의 정당성도 흔들리게 된다. 이런 점은 지역 내에서 자원을 둘러싼 헤게모니 갈등이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럽기까지 하다.

문제는 기초문화재단이 이제는 한 도시를 대표하는 문화기관으로 결정되고 숱한 도시 간 문화경쟁의 선수로 호명되었다는 점이다. 문체부 산하기관의 웬만한 공모사업은 이제 기초 문화재단이 싹쓸이하고 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규모와 역량을 갖춘 예술법인이나 문화단체가 기초 문화재단들과의 경쟁에서 버텨내지 못하고 있다. (나는 이런 측면에서 지역의 문화재단 설립이 지역문화예술 생태계를 육성하고 있는지 의구심을 갖고 있다.) 사업의 수월성 측면에서인지 아예 지원 자격을 기초 문화재단으로 한정하여 시작되는 사업들도 있다. 갈수록 국비 공모사업에 지방비 매칭을 의무사항처럼 세팅하다 보니 지자체 출연기관인 기초 문화재단이 재정적인 문제를 풀기에 적합한 채널임은 분명하다.

이러한 변화의 가속화는 중앙의 문화정책과 드라이브 때문만은 아니다. 지역 내에서 여러 관계자들이 기초 문화재단에 바라는 기대 사항 중 하나는 더 많은 국비의 확보다. 아예 연간 평과 수치로 당해 연도 얼마의 국비와 도비를 확보했는지를 밝히게 하고 이에 대한 은근한 압력은 일상적이라 할 수 있다. 재원이 취약한 군소도시 입장에서 한 푼이라도 국비를 더 확보하는 것이 절대적인 과제이니 덩달아 문화재단도 문화예술 분야 사업비 확보에 내몰리게 된다.

모든 지자체가 비슷한 상황이니 경쟁이야 어쩔 수 없다 해도 아직 기초 문화재단을 설립하지 못한 지자체들은 아예 그 장에 진입이 불가능하고 그에 따라 지역 간 격차는 더 심해질 것이다. 그리고 지자체 재정과 인구수가 받쳐주는 선발주자 격의 지역문화재단은 공모사업 선정 비율이 점점 더 높아지게 된다. 중앙정부 평가 시스템상 전년도나 최근년도의 유사사업의 실행 건과 사업 규모는 중요한 지표다. 그러다 보니 문화도시와 같은 대규모 사업을 한 곳이 다음 단계의 더 큰 규모의 사업에 선정될 가능성이 크다. 문체부 사업 또한 점점 더 선택과 집중 전략을 추구하는 추세인 것 같은데, 이러다 보니 신생 재단이나 아직 체계를 갖추지 못한 재단들은 경쟁 속에서 부침을 겪게 된다. 그야말로 전국의 문화재단이 우후죽순, 춘추전국시대에 돌입했지만 중앙정부의 경쟁적이고 선별적인 문화정책은 지역마다 역량과 자원, 수준과 단계 등을 고려하지 못한 채 빈익빈 부익부를 키우는 편중된 문화정책이 아닌가 싶다.

새로운 정부가 탄생하면 지금까지 진행해 온 지역문화정책과 구조를 들여다보고 쏠림과 편중으로 인해 더욱더 취약해지고 있는 지역문화는 없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나라는 그만 구하고 이제 도시를 구하자"
조반장_ 포도책방의 포도대장

“전생에 나라를 구했냐”는 말을 속담처럼 쓰는 나라는 우리가 유일하다. 평범한 일상을 살다가도 나라가 위기에 빠진 것 같으면 어김없이 일상을 뛰쳐나가 나라를 구한다. 돐반지를 기꺼이 내고, 남의 동네에 가서 바위에 묻은 기름때를 날밤 새워 닦고, 회사로 출근했다 광화문으로 퇴근하는 삶을 몇 달씩 버텨낸다. 

그렇게 온 힘을 다해 나라를 구하는 사이 도시는 조금씩 곪아갔다. 도시가 무너진다는 건 다양성이 줄어든다는 것이고 일상이 피폐해진다는 것이다. 진격의 서울로 지방은 소멸을 걱정하는 처지가 됐고 더 이상 진격할 사람조차 줄어들자 서울을 버텨주던 다양성도 쪼그라들었다. 

건축(建築)은 세우고 쌓는 일이고 도시는 세우고 쌓는 것을 반복하는 과정의 산물이다. 비단, 건물만이 아니라 문화와 예술/복지와 돌봄/환경과 인권 등 도시의 모든 요소가 그렇다. 급하게 세운 건 무너질 수 있어도 오랫동안 정성스레 쌓은 건 상처는 나더라도 무너지지 않는다. 

이 글을 쓰는 새벽. 동네에서 45년을 버티고 스물다섯번째 축제를 만들어낸 이들의 잔치가 끝났다. 극단 갯돌의 <25회 세계마당페스티벌>이 목포를 어떻게 버텨주는가를 확인하기에 충분했다. 무던히도 많은 나무를 깍아 수십년에 걸쳐 도시 곳곳에 이쑤시개 만한 기둥을 촘촘히 박았다. 

젓가락 300개로 버티는 것보다 이쑤시개 30,000개로 버티는 나라가 더 단단하다. 그러기 위해 오늘도 소소한 실험을 하고 촘촘한 축적을 하자. 내가 사는 도시에서 더 세심하고 날카롭게 칼을 갈자. 이쑤시개를 다듬고 심는 이들에게 박수를 치고 응원을 하자.

 

 

“문화정책은 ‘집행’이 아니라 ‘생태계 조성’이어야 한다”

주혜자_세계여성공연예술축제 예술감독

2025년 대선을 앞두고, 예술가인 나에게 가장 절박한 질문은 단 하나다. 구조적 모순을 이기고 지역 예술가로 계속 살아갈 수 있는가? 나는 25년 간 부산에서 연극을 연출해 왔고, 지난 5년 간 여성의 시선으로 세계를 마주하는 ‘여성축제’를 기획해 왔다. 그러나 이 축제는 지금 존속 위기에 처해 있다. 왜냐하면 이곳엔 ‘지속 가능성’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중앙집중형 문화정책이 낳은 구조적 불균형
한국의 문화정책은 여전히 서울과 수도권 중심의 산업구조와 가치체계에 기반하고 있다. 전체 문화예산 중 대부분이 서울에 집중되며, 문화 인프라와 콘텐츠 유통망, 인력 양성 체계도 수도권에 편중되어 있다. 반면 지역은 스스로 생존해야 하는 현실 앞에서 끊임없는 탈락과 소진을 반복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단순한 지역 간 격차를 넘어, 문화의 정치적 편중과 창조적 다양성의 붕괴를 의미한다. 특정 권역에만 문화가 집중된다는 것은 곧 문화민주주의의 위기이며, 이는 문화가 더 이상 공공성을 지키지 못하는 지점과도 맞닿아 있다.

민간 축제를 제거하는 새로운 통제 방식
팬데믹 이후,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민간이 주도하는 축제에 대한 지원은 사실상 폐지되거나 극도로 축소되었다. 공공기관이나 지자체 주도의 행사만을 우선 지원하는 구조가 형성되면서, 자율성과 실험성, 그리고 비정형적인 기획이 가능한 민간 축제들은 존속이 불가능한 지경에 이르렀다.
이는 결국 문화행정의 중심이 콘텐츠 다양성이 아니라 행정 효율성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다양성은 정책의 외곽으로 밀려났고, 표준화된 문화만이 생존하는 구조 속에서 예술은 기획 가능한 위험이 아니라 관리 가능한 사업이 되어버렸다.

지역 문화예술 생태계의 중장기 육성
지역 예술가들이 장기적, 자립적으로 창작할 수 있도록 공간, 네트워크, 유통 구조, 교육 프로그램 등 종합 생태계가 설계되어야 한다. 행정 주도의 일회성 공모사업은 지역 예술 생태계를 파괴한다는 사실을 정책 입안자는 자각해야 한다.

민간 주도 축제에 대한 공적 지원 회복
민간 축제는 자율성과 실험성을 전제로 하며, 그것이 지역 문화 다양성의 핵심 동력이다. 민간 축제를 불안정한 주체로 보는 시선이 아니라, 문화 민주주의의 파트너로 인정하는 정책 전환이 필요하다.

문화 다양성과 젠더 감수성을 반영한 정책 설계
여성, 청년, 장애인, 이주민 등 다양한 시선이 문화정책 설계 과정에 실질적으로 개입할 수 있어야 하며, 예산과 구조에서부터 그 감수성이 작동되어야 한다.

예술은 늘 주변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그 주변이 끊임없이 해체되고 자본과 기회의 중심으로만 이동한다면, 예술은 결국 표준화된 소비상품으로 전락하고 만다. 나는 지금도 지역에서 연극을 만들고, 축제를 기획하고, 삶을 예술로 통역하고자 한다. 그러나 그것이 개인의 희생과 열정만으로 가능해서는 안 된다.

이제는 국가가 책임져야 할 예술이 아니라, ‘공공이 공동으로 유지할 문화 생태계가 필요하다. 대선은 그런 질문을 다시 꺼낼 수 있는 기회다. 누가 지역을 진짜 문화의 공간으로 다시 그려낼 것인가? 예술인으로서 나는, 그 질문을 끝까지 던질 것이다.

 

 

“정책은 파일로 남고, 사람은 떠난다”

최아영_ 지역문화재단 실무자

정책은 늘 새로 만들어지지만, 현장은 늘 제자리다. 매년 새로운 이름을 단 사업이 쏟아지고 또 다른 공약이 펼쳐진다. 누군가는 떠나고, 누군가는 버티고, 누군가는 사라진다.

정책은 문서로 남지만 사람은 기억으로만 남는다. 예산과 평가가 지나간 자리엔 고생한 손들과 발자국들만 어렴풋하다. 문화는 제도보다 오래 남는 마음이고, 기억이고, 관계다.

지역은 실험실이 아니다. 매번 새로 태어나는 사업보다 그 자리에 머무는 사람을 지켜야 한다. 선거가 전환이라면 정책도 지속이어야 한다. 문화는 시스템이 아니라 사람의 경험으로 남는다. 그 경험이 쌓여야 진짜 미래가 된다.

 

 

“정치는 더 이상 건축과 도시를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로 삼지 마라! “

최영준_ 건축가, 오피스아키텍톤 소장

건축은 삶의 방식을 새롭게 구축하는 매개체이다. 그저 인간의 삶을 담는 물리적인 공간을 구축하거나, 그저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하는 도구가 아니다. 따라서 정치는 건축을 경제 발전의 수단으로 삼으려는 수준을 넘어 새로운 이념적 기초 위에서 새로운 사회를 구성하고자 하는 열망, 인간사회를 둘러싼 환경을 총체적으로 바꾸고자 하는 열망, 그리고 인간의 일상적 공간을 변형시킴으로써 그것이 가능할 수 있다는 희망을 건축과 도시를 통해 실현하고자 하여야 한다. 행정은 현대 기술과 산업을 통해 개인이 자신의 삶터와 일터를 개인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으로 스스로 구축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거나, 또는 공공의 예산으로 구축하여 아주 작은 비용으로 사용할 수 있는 공동(공유자산)의 공간을 확보하려 노력해야 한다.

도시는 인간이 삶의 질을 포함하여 사회적 합의에 의해 수립된 우리 공동체의 이상과 가치를 실현하는 물리적-비물리적 터전이다. 그저 무리를 이루어 살기 위하여 조성하거나, 그저 경제를 살리거나 부흥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다. 따라서 정치는 도시가 환경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방식으로 개발하는 수준을 넘어 도시를 하나의 유기체로 보고, 다양한 도시 활동과 공간 구조가 생태계 속성(다양성, 자립성, 순환성, 안정성 등)을 가지도록 하여 인간과 동식물을 포함하는 자연이 공존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자 하여야 한다. 친환경과 생태적 전환은 국가가 먹고 사는 문제와 연결하여 그저 해결해야 할 대상으로 보거나, 위에서부터 새롭고 사회적으로 계몽된 사고방식을 부과하는 데 있기보다는, 시민들의 일상생활과 삶이 실질적인 생태적 변화를 통해 이루어져야만 한다.

 

 

“매일이 문화가 있는 날! 노동 시간 단축으로 쟁취하자!”

한준규_노동당 문화예술위원회 회원

나는 연구실에 있다. 근무 시간 내 끝내지 못한 실험이 있으면 야근을 한다. 보통 그렇다. 우리 방 말고도 불빛이 꺼지지 않는 방들이 보인다. 회사원들이다. 지난 수요일은 ‘문화가 있는 날’이었다. 지난 수요일에 나와 저들에게 문화가 있었나? 일찍 퇴근하는 날도 마찬가지다. 퇴근해서 저녁 먹고, 씻고, 청소하고, 빨래 돌리고 하다 보면 무엇을 하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다. 우리나라는 자원도 부족하고, 지방 인구도 부족하고, 사회적 관용도 부족하고, 부족한 것이 참 많지만 노동시간은 과다하다.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것은 문화와 예술이라고들 한다. 우리는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할 권리가 있다. 노동 시간 단축을 통해 우리의 매일에서 문화와 예술을 발견하자! 매일이 문화가 있는 날, 노동 시간 단축으로 쟁취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