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④] 1996년, 한국 문화향유정책의 기원1
편집자 주: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 문화정책의 지형을 두텁게 그려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사건과 논쟁에 대한 입체적 복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기원을 살피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 드립니다.
① 시작하며- 기원을 입체적으로 복기하기_ 염신규
② “이른바” 3S정책1: 유신이 억압하고 있던 것들_ 염신규
③ “이른바” 3S정책2: 개방과 강력한 통제의 공존_ 염신규
소외계층 문화순회사업, 사랑티켓, 통합문화이용권(문화누리카드), XX나눔, 지방문예회관 특별프로그램지원, 사립 미술관 전시 지원, 서민 풀뿌리 문화나눔, 신나는 예술여행, 방방곡곡 문화공감 사업…
과거에 시행되었거나 현재까지도 시행되고 있는 문화향유정책·사업들이다. 일반 시민들에게는 다소 낯선 이름들 일지 몰라도 최소한 문화예술계에서 수년 이상 일을 해온 사람이라면 이중 한 두 가지 사업에는 참여를 했을 가능성이 높다. 아니 참여를 하지 않았더라도 최소한 이름은 들어봤을 것이다. 한국의 문화예술지원정책을 크게 두 축으로 나눴을 때 향유정책·사업이 한쪽을 크게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냐하면 국가의 대표적 예술지원기구인 한국문화예술위원회(아르코)의 연간사업비 비중에서 향유 지원 쪽 예산이 창작 지원 분야를 능가한 상황이다. 물론 이것은 이유가 있다. 아르코 향유 지원 예산의 큰 부분이 통합문화이용권 사업 등으로 복권기금에서 들어오는 사업비인데 복권기금의 제도적 성격상 향유 지원 이외에는 사용될 수 없기 때문이다. 반면에 문예진흥기금 자체는 사실상 고갈된 상황이기 때문에 창작지원예산은 십수 년 이상, 꽤 오랜 기간 동안 사실상 동결 상태에 가깝다. 이유가 어찌되었건 이런 불균형 때문에 예술계 일각에서는 십수 년 전부터 향유정책이 강화되면서 창작지원의 위축되고 있다는 볼멘소리도 나오고 있고 그 원인을 특정 문화운동집단이라고 지목하며 공격하기도 하는데 근거 없는 모략이다. 한국의 공공 문화예술지원에서 향유 분야가 커진 것은 일단 복권기금 사업비의 용도 제한과 같은 제도적 이유가 있고 좀 더 내밀하게 파고들어 가면1990년대 후반 이후 지금까지, 표면적 정권 교체와는 무관하게 지속되고 있는 정부, 혹은 행정 매커니즘의 성격 때문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나중에 좀 더 자세히 쓰겠다.
창작지원, 향유지원의 균형 문제 같은 것보다 사실 더 천착해서 들여다봐야 할 문제는 현재까지 이어지는 한국에서의 향유정책·사업이 추구하고 있는 목표가 무엇이며 그것에 부합하는 성과를 만들어내고 있는가의 측면이다. 피상적으로는 그간의 향유정책이 갖는 실효성에 대하여 회의감이 드는 것이 솔직한 소회인데 이것은 향유정책이 일반적으로 목표하는 두 가지 측면, 시민 전반에 걸쳐 고르고 차별없는 문화예술 기회 확대의 측면과 잠재적 소비자, 관객(audience)의 개발을 통한 시장의 자생력 증진이라는 측면에서 뚜렷한 성과가 없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한국의 문화향유정책이 이렇게 계속 가는 것이 맞는가에 대해 질문을 정면에서 해야 하는 상황인데 그 본격적인 질문을 위해서 시간을 좀 거슬러가보자. 한국에서 문화향유정책이 처음 본격적으로 설계되기 시작한 시점인 1996년으로 말이다.
세계화와 문화복지
1996년 2월 문화체육부는 세계화추진위원회를 통하여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문화복지 기본구상”을 발표하였다. 이는 전년도인 1995년 12월 세계화추진위원회 산하 국민복지기획단이 발표했던 “국민복지 기본 구상안”의 문화 버전이라고 할 수 있었다. 발표된 시기가 1995년말, 1996년 초이지만 사실상 당시 문민정부(김영삼 정권)가 정권 수립 초기인 1993년부터 준비해 왔을 것이라 추정된다. 당연히 그럴 것이 문화복지는 김영삼 대통령이 1992년 대통령 후보 시절부터 내세웠던 공약이었다.([대선특집: 문화정책과 국가주의 ②] 1992년 14대 대선- 정책선거와 문화공약의 시작) 물론 그 이전의 정권에서도 전두환 정부 시절에 추진했던 기초지자체 단위 문화예술회관 건립과 같이 시민들의 문화향유의 기본 인프라를 갖추고자 하는 정책 시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문화복지를 전면에 내세운 것은 김영삼 대통령의 공약이 거의 최초였다.
김영삼 정부가 후보자 시절부터 문화복지를 전면에 앞세울 수 있었던 것은 우선 1990년대 초반 한국 사회가 유래없이 물적 풍요를 겪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1980년대 후반부터 1997년 IMF사태 이전까지의 한국 사회는, 비록 북미자유무역협정, 우루과이라운드 타결, 세계무역기구 출범과 같이 외부적으로는 매우 위협적인 정글의 질서가 강화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적으로 시중에서 자원(돈)이 가장 활발하게 돌았던 풍요의 시기였다. 1990년대 초반 등장했던 X세대 담론의 주요 원인으로 당시 청년 세대의 높은 자기 가처분 소득이었다는 분석이 있을 정도이니 말이다. 폭풍 전 고요와 같은 일시적인 경제적 풍요가 문화복지가 호명된 원인의 하나였다면 또 한 가지는 1980년대 후반 대통령 직선제 개헌과 군부세력 퇴장과 같은 형식적 민주화가 완성되며 사회적 분위기가 유연화되었던 것이 또 한 가지 큰 이유였다. 1980년대 후반, 최소한 노태우 정부 수립 이후의 한국 정치권은 여야의 정치세력을 막론하고 소위 글로벌 스탠다드에 부합하는 정상적 국가를 지향하고 있었다. 1970년대 이래 쌓아올린 경제적 자산을 기반으로 권위적인 개발독재국가의 오명을 벗고 세계적 수준에 부합하는 국가로 거듭나야 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해 있었다. 사회복지 영역도 마찬가지였는데 그것이 단지 국민의 삶의 질이나 국가의 품격 문제뿐만 아니라 닥쳐오는 세계화 시대에 필요한 국가경쟁력의 하나로 인식되고 있었다. 앞서 언급한 “국민복지 기본구상”이나 “문화복지 기본구상” 같은 것들이 다른 곳이 아닌 세계화추진위원회를 통해 발표되었다는 것은 이런 맥락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당시 문화복지 기본구상에는 어떤 것들이 담겨있었을까? 당시 문화복지 기본구상을 발표했던 김순규 문체부 문화정책국장의 “집중기획 / 국민의 '삶의 질'과 문화복지 - 21세기 '삶의 질' 세계화를 위한 문화복지 비전”(월간 『문화예술』 1996년 4월,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을 요약해 옮기면 다음과 같다.
우선 정책 배경으로 다음의 3가지를 들고 있다.
경제적 성장에 따른 삶의 질 개선 필요: 문화복지는 기본적으로 국민들의 '삶의 질'과 직결되어 있음. 최근(1990년대 중반) 들어 우리 사회에서는 '삶의 질'에 대한 관심의 논의가 크게 높아지고 있음. 이는 국민소득의 상승과 함께 나타나는 매우 자연스런 현상. 1인당 국민소득은 1만 불 대에 들어섰으며 2001년경에는 2만 불 대에 도달할 것으로 예측됨. 국민소득의 상승은 당연히 국민들의 생활패턴과 의식에 커다란 변화를 예고하고 있으며 문화, 건강, 여가와 같은 정신적·문화적 욕구가 나타나기 시작할 전망임.
삶의 질 개선에 있어서 문화적 욕구 충족의 필요성: 국민소득 1만 불 시대에는 의·식·주만으로는 절대로 '삶의 질'이 보장된다고 할 수 없음. 물론 국민소득이 다소 높아진다고 해서 경제적·물질적 욕구나 사회복지가 무시될 수는 없으나 우리 사회가 그동안 경제우선주의에 치중해 온 폐단을 생각해 본다면 정신적·문화적 욕구에 대한 보다 혁신적인 배려가 요망되고 있음. 진정한 의미에서의 '삶의 질'이 절실하게 요망되는 상황에서 선진형 사회가 갖추고 있는 문화생활, 체육생활, 여가생활의 기반을 우리도 하루빨리 갖추어야 할 시기임.
문화복지를 통한 사회복지의 한계 보완: 전통적 의미의 사회복지가 한계를 드러내고 있는 상황에서 정신적·문화적 욕구를 충족시키는 문화복지는 보람있고 여유 있는 삶을 보장하기 때문에 많아서 부작용이 생길 우려가 없고, 사회복지와 조화함으로써 우리 사회에 활력소를 공급하는 생산적 역할을 할 수 있음.
이런 배경 하에 네 가지 기준을 제시했는데 다음과 같다. ①기본이념 면에서는 진정한 의미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것을 문화복지의 목표로 삼고, 구체적으로 각 분야별로 문화 및 청소년 분야에서는 '선진형 문화생활', 체육 분야에서는 '건강한 생활', 그리고 여가 및 관광 분야에서는 '쾌적한 여가생활'을 실천이념으로 정함. ②문화복지의 주체는 문화의 향유자인 개인과 가정을 전제로 함. ③지역 개념인 생활권역을 기초로 함. ④문화복지의 대상은 단순한 문화 분야뿐만 아니라 문화체육부의 업무 영역인 문화·체육·관광 및 청소년 분야를 망라함.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②에서 과거의 문화예술정책이 창작자와 소수의 애호가를 중심에 두었던 것을 한계로 지적하며 보편적 시민층으로 확대하며 특히 정부 등 공공주도의 문화복지가 아닌 개인과 가정이란 사적 단위에서의 문화복지를 확대하겠다는 것을 강조한 지점이다. 또한 ③에서는 문화복지지수를 도입하여 도보나 대중교통으로 간단하게 접근할 수 있는 문화복지를 강조하고 있으며 ④에서는 문화예술에 국한되지 않은 “광의의 문화 개념”에서 문화복지를 실현하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근 30년이 지난 지금 현재의 시각에서 봐도 상당히 진보적이고 높은 기준치를 정부가 앞장서서 제시하고 있었다. 단순히 문화프로그램을 소외계층을 중심으로 공급하겠다는 수준을 훌쩍 넘어서 시민들의 일상적 생활권 단위에 문화 인프라를 대폭 확충하여 사적 일상과 직장(일터)을 망라하여 문화활동이 가능한 환경을 구축하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 당시 0.56퍼센트에 불과하던 문화부문 예산을 1퍼센트로 조기에 달성할 계획을 내세웠고. 지역 문화복지를 추진할 주체인 지방자치단체의 예산도 광역자치단체 2퍼센트(당시 1.77퍼센트), 기초자치단체 3퍼센트(현재 2.11퍼센트) 수준으로 확대를 유도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그리고 이와 같은 정부 및 지방자치단체의 정규 예산외에 별도로 '문화복지기금'을 설치하여 각 지역의 문화복지 시설자원의 확충과 관리를 지원할 계획을 내세웠다.
이런 구상 하에 문화부는 같은 해 3월 문화복지기획단을 발족시켰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박동규 교수를 단장으로 했던 문화복지기획단은 총괄(복지일반) 및 문화예술분과, 체육분과, 청소년분과, 여가 및 관광분과등 4개 분과에 걸쳐 총 41명의 위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문화복지중장기 실천계획”보고서를 발간하였다. 이 보고서는 문화복지에 관한 실천계획을 중기(1996~2001)와 장기(2001~2011)로 나누어 계획하였으며 앞선 4개 영역별로 최우선과제, 우선과제, 장기과제를 제시했다. 당시에 제시되었던 과제 중 복지일반 및 문화예술 분야의 과제를 분류해서 보면 다음과 같다. 1990년대 후반 이후 우리에게 익숙한 사업의 이름들을 쉽게 만날 수 있다. 이에 대한 해석은 다음 호에 이어가겠다.
<표> 문화복지 중장기 실천계획 : 문화예술 및 복지일반의 과제분류(시기별)
정책과제 | 사업계획 | ||
최우선과제 | 우선과제 | 장기과제 | |
기본적문화공간의 확충 | 문화의집 설치 지원 공공도서관의 건립 지방문예회관의 건립 국공립 박물관 및 미술관 건립 종합문예회관 건립 문화지구와 문화의 거리 조성 문화복지지수 조사 |
전문박물관 및 미술관 설립 대중공연장 설치 및 건립 국립자연사박물관의 건립 첨단영상테마공원 건립 |
지역 문화복지시설 건립 촉진법 제정 검토 |
국민문화향수기회확대 | 문화학교 및 문화동호인 모임 활성화 문화프로그램 개발 및 네트워크 운영 각종 교육연수과정에 “현장중심”의 문화체험 가회 확대 가정문화운동 전개 가족공연물 선정·지원 |
공연·스포츠경기의 온라인 티켓팅시스템 정착 지역축제 활성화 지원 문화정보서비스체계 확립을 위한 초고속 정보망 구축 생활문화복지 요원 양성 문화복지이념의 대국민 홍보 확산 |
문화공간·시설의 운영 개선 첨단과학 기술을 응용한 문화오락 프로그램의 개발·보급 |
함께누리는문화복지실현 | 문화나눔운동 장애인을 위한 편의시설 확충 및 프로그램 확산 찾아가는 문화프로그램 민간 문화 봉사활동의 활성화 |
점자도서관 건립 및 점자 서적 제작 지원 수화 통역사 풀(pool)제 운영 특수언어 표준화 및 문화활동지원 |
표 출처 : 「문화복지 중기계획 연구」, 김세훈 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2008.
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