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2025대선 ①] 프롤로그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20인의 외침!”
편집자 주: 긴 탄핵정국이 끝나자 제21대 대통령 선거가 시작되었습니다. 각 정당의 대통령 후보 선출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곧 각 정당의 후보자들의 선거 유세가 시작됩니다. 그러나 선거는 후보자들의 경합만 존재하는 공간이 아닙니다. 선거는 정치적 요구들이 쏟아져 나오는 공간이며, 후보자들은 마땅히 그러한 요구들을 속에서 경합해야 합니다.
[문화정책리뷰]는 제21대 대통령선거를 맞이하여 ‘특집:2025대선’을 마련했습니다. 후보자들의 약속에 갇히지 않고 오늘을 성찰하고 내일의 비전을 찾아보고자 합니다. 이번 기획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를 담은 “프롤로그 “선거는 왜 우리의 목소리를 담지 못하는가! 20인의 외침!”으로 시작합니다. 많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관객개발, 단체에 떠넘기지 말고 공공부터 나서라”
나희경_ 연극기획자
지원사업 신청서를 쓸 때 마다 눈에 띄는 항목이 있다. 이름하여 ‘관객 개발 계획’. 이 항목을 볼 때 마다 예술지원기관에 묻고 싶다. “귀 기관은 관객 개발하고 있습니까?”
내가 생각하는 예술지원기관의 ‘관객개발’은 국민의 일상에 침투하는 것이다. 국민에게 이용권과 패스를 제공하면서 소비를 유도하는 홍보마케팅 말고, 소비하지 않고도 학교에서 일터에서 자연스럽게 문화예술을 접하고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문화예술을 찾아 나설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이런 의미의 관객개발을 실천하던 거의 유일한 사업이 ‘신나는 예술여행’이었는데 사업이 커지기는커녕 오히려 사라졌다.
예술지원기관의 역할에 대해 이야기 나누는 자리에서 '어린이 청소년 시기부터 문화예술을 경험할 기회가 많아져야 한다'는 이야기를 했다가, 어린이 청소년을 위한 작품 창작 지원과 홍보마케팅에 힘쓰겠다는 답변을 들었다. 공공기관이 아니라 문화예술지원 기업인걸까? 공공의 당위를 스스로 찾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문화예술아, 생활의 숙련공이 되자”
드라마고_ 생활교육연수원 한붓꽃그림 교육원장
나는 점점 도시의 사람들과 문화나 예술을 이야기하는 것이 싫어졌다. 약간 비약하자면 그들과 멀리 살고 싶어서 도시를 떠나 시골로 왔다. 착하고 성실한 이들도 있었으나 그들은 조용한 편이었고, 다른 일부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수사적 언어로 문화와 예술을 이야기하고 큰 정치와 철학을 이야기했으나, 정작 그렇게 정의롭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경우는 보기 드물었다. 조용한 이들과도 이 사회의 문제와 삶의 대안을 충분히 이야기하지는 못했다.
도시의 문화관계자들과 예술가들과의 만남은 ‘술자리 후 다음 날 아침에 그대로 남겨진 술잔과 그릇 같다’는 느낌으로 남아있다. 술과 음식 냄새가 뒤섞여 고약한 냄새가 나고 말라붙어 잘 떨어지지도 않는 그릇들이 나뒹구는 자리를 정리하지 않고 가버린 사람들 같은 것이다.
나에게도 잘못은 있었다. 타인에 대한 존중이 부족하고 내가 옳다고 크게 떠드는 나의 말과 행동으로 내가 싫어하는 이가 아닌데 마음의 상처를 준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 일이 생기면 대부분 다음날 사과의 전화를 했지만, 그런다고 그도 나도 마음이 정화되지는 못했다.
지금도 가끔 그런 나의 잘못이 떠올려지면 민망하고 미안한 마음에 더 일찍 일어나 설거지를 하고 밥을 하고 저녁이 될 때까지 땅을 파고 식물을 심고, 물을 준다. 물건을 고치고 필요한 것이 만들고 어지러운 주변을 정리하다보면 싫고 미안한 마음들은 흩어지고 새롭게 사물들과 연결되고 깔끔하고 조화로운 풍경을 마주하게 된다. 그 사이 고요하게 스스로 살아가는 자연도 목격한다.
그런 날은 소설가 박경리 선생님의 시詩들이 읊조린다.
<확신>(요약, 해석): 자신이 옳다고 확신하는 시인도 많고, 운동가도 많고, 설교자들도 많아, 사람과 생명들은 보잘 것 없는 것들이 되었다. 땅과 대기를 정화하고 불로 밥을 지어 대지를 향해 겸손과 감사의 의식을 행하는 것이 그 옳고 그름이 없는 본성일 것이다.
<사람의 됨됨이>(부분 발췌): “인색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위해 낭비하지만 후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게는 준열하게 검약한다” “사람 됨됨이에 따라 사는 세상도 달라진다” (중략) “천국과 지옥의 차이다”
<꿈>(부분 발췌) “글을 쓸 때는 살아 있다. 바느질할 때 살아 있다. 풀을 뽑고 씨앗 뿌릴 때 살아 있는 것을 느낀다.”
<천성>(부분 발췌) “한 가지 변명을 한다면 공개적으로 내지른 싫은 소리 쓴소리, 그거야 글쎄 내 개인적인 일이 아니지 않는가”
박경리 선생님은 인생의 마지막 작업으로 원주시 매지리의 ‘토지문화관’을 여셨다, 한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토지 문학관이 아니라 토지 문화관이에요. 문학은 중요하지 않아요. 문화가 중요한 거지. 문화보다 생명이, 생존이 중요한 거야. 그것도 모르면서 문학을 할 수는 없어요”라고 말씀하셨다. 그곳에서 직접 농사를 지어 후배 작가들에게 밥을 해주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농사를 지었고 자신의 옷을 직접 만들어 입으셨다. ‘일회용기에 물이 담겨 판매되는 세상’이 올까 걱정하시던 그는 ‘자연과 환경’, ‘생명의 능동성’, ‘연민의 사랑’이 ‘예술의 본래의 주제’임을 지식인과 예술가들에게 누누이 이를 강조하셨다.
나는 시골로 이주했고 박경리 선생님의 공간과 생활을 닮고 싶어 ‘생활교육연수원’ 만들고 이곳에서 농사도 짓고 이런 이야기와 활동을 하는 수업을 한다. 이 내용을 모르는 도시에서 만난 어떤 예술가는 ‘왜 생활을 교육하냐’고도 하고, ‘생활교육하는 사람이 왜 예술을 심사하냐’고도 한다. 생활교육과 생활노동에 대한 무시와 도발이다.
시골에 있는 이곳으로 생활과 교육이 진짜 궁금해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다. 이곳에서의 대화는 꽃과 나무의 이름이라던가, 씨앗을 뿌리고 거두는 시기라던가, 비닐멀칭이냐 풀멀칭이냐 같은 논쟁을 하고 집을 짓고, 가구를 만들고, 동물을 키우는 것에 대한 과정을 이야기한다. 생명과 생존, 자연과 공존, 접촉과 감각으로 다른 대상과 존재적으로 마주하는 “I see you”가 작동하는 장면이다.
이런 생활은 ’말을 하게 되다‘라는 인간이 문화와 ’농사를 짓다‘는 예술의 본래의 뜻에서 다시 출발할 수 있게 한다. 자연과 정원과 텃밭과 수선실과 공작실이 있는 이곳에서 살아가는 단어들은 서로 연결되고 실천적 문장으로 통합된다. 이런 자연과 사물과 환경이 연결된 곳에서의 대화는 생활의 실천을 불러와 함께 일하고 대화하게 한다.
요 며칠사이 가장 핫한 문화뉴스가 있다. 대통령 탄핵이라는 정치에서 시작해 헌법재판이라는 사법제도를 지나 문형배 재판관이라는 인물로 넘어온 뉴스가 이제 ‘어른 김장하 선생’이라는 인생철학 영역으로 넘어와 있다. 우리는 “우리 사회는 평범한 사람들이 지탱하고 있는 거다”라고 말하는 김장하 선생의 말씀이 “노동을 통한 소득을 사회로 환원하는 삶의 태도”와 “온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의 인생의 철학으로 평범한 시민들에게 전해지길 바라고 있으며, 우리의 문화와 예술이 같은 태도로 사회적 대안을 출발점에 함께 서길 기다리고 있다. 계엄에 항거한 시민과 시민에 대한 공격을 거부한 군인들이 함께 옳은 일을 했다는 성취감을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우린 무엇을 더 찾아야 할까? 사법적 판결이 나면 끝난 걸까?
우리 사회는 10년 사이에 두 번의 탄핵될 대통령을 뽑는 일을 저질렀다. 그리고 그를 탄핵하는 일도 성공했다. 다행이면서도 씁쓸하다. 다시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어른 김장하 선생’은 자신으로 노력으로 더 낳은 세상이 되지 못한 아쉬움을 표하신다. 어떻게 해야 우리의 세계는 더 나아질 수 있을까?
식사자리나 술자리는 누가 차리고 치워야 하는가? 당연히 함께 차리고 함께 치워야 한다. 그런데 배달된 음식들과 일회용품 쓰레기들은 더욱 늘어났다. 뷔페식당에서 쉽게 사고 펼쳐지고 먹고 버려진다. 그만큼 사람들의 대화와 공동의 생활은 과정이 단축되고 맥락이 잊혀진다. 이런 생활로는 정치이고 경제이며 문화인 예술의 내용을 통합적으로 인식하고 소통할 수 없다. 생명을 살리는 음식이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고 싶어하지 않는다. 어떤 일이든 긴 과정이 있고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영향을 미친다는 의식이 없이는 자연의 파괴로 생기는 이상 기후와 어처구니없는 독재자를 민주적 선거로 선출하는 일은 반복될 것이다. 예술을 고급문화로 생활을 허접한 하위문화로 인식하는 무지의 폭력도 계속될 것이다.
생활生活의 사전 뜻은 이렇다. “생명은 일정한 환경에서, 생계와 살림을 꾸리고, 구성원들과 함께 살며, 그에 어울리는 행위를 하며 살아간다.” 환경에 대하여, 살림에 대하여, 함께 살기와 나의 행동을 함께 탐구하고 실천하는 일은 온전한 사람이 되기 위해 필요한 필수적 활동들을 알려준다. 여기에 ‘술자리 차리기, 치우기’를 대입해 보라. 생활의 환경이 디자인되고, 살림의 과정과 함께 하기의 철학이 태도가 되고, 실천하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된다. 이 생활은 글이 되고, 그림이 되고, 노래가 되고, 연극이 될 수 있다.
“새해에는 잘 보고 들어야겠습니다.” 가수 김창완의 말씀이다. “성장하고 늙어갈수록 사소한 여러 생활을 관리하고 조화롭게 하는 능력이 생기면 말과 실천이 일치되고 인생이 완성되어 간다. 그것은 예술의 과정과 같은 것이고 완성된 노인의 모습은 조화로운 조각상과 같다.” 사회 심리적 발달론으로 평생을 연구한 에리 에릭슨 선생님의 말씀이다. 우리는 이렇게 멋진 선생님들의 생활을 잘 보고 말씀을 잘 듣고 스스로 실천해야 한다.
사람은 인생의 숙련공이 되어야 한다. 사람은 생활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실천한다. 그렇게 깨달은 ‘인간이자 어른이자 노인이 많아질 때’ 사람들은 서로를 통해 배우고 소통하고 실천할 수 있다. 그것이 각자의 말을 쓰고 각자의 삶을 그리는 독재자가 없는 민주주의 사회의 이상이지 않은가? 그것의 환경과 과정과 행동을 담아내는 것이 예술의 사회적 역할이다.
2025년 4월 21일 월요일 새벽 강원도 홍천의 생활교육연수원에서 아주 오랜만에 서울로 보내는 글을 쓴다.
“접두사 K를 버리자”
박동수_ 영화평론가
“K-무비의 변화와 도약을 함께하는 파트너”(영화진흥위원회), “넥스트 K를 선도하는 글로벌 콘텐츠 파트너”(한국콘텐츠진흥원). '진흥'을 내세운 공적 기관들의 비전은 K로 가득하다. 이때의 접두사 K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K-무비는 한국영화와 무엇이 다른 것인가? 문화 '진흥'을 목표로 설립된 기관들이 진흥하고자 하는 것은 문화보다는 산업이다. 문화 향유권이나 문화가 시민에게 건네줄 수 있는 즐거움과 같은 논의는 이러한 구도 속에서 배제된다.
“<쥬라기 공원>의 흥행수입이 자동차 150만 대를 수출하는 것과 같다”라는 레토릭으로 요약되는 국내 문화진흥정책에는 ‘산업’이라는 단어가 괄호쳐져 있다. 해외영화제에 진출하고, 마켓에서 거래되고, IP로 수출할 수 있는 문화생산물을 개발하고 플랫폼을 만들어가는 것은 문화가 아니라 산업 진흥의 이념을 따른다. 산업 중심의 정책에서 산업과 창작자는 이어질지라도 문화 향유자와 수용자는 (재)생산되지 못한다.
지난 30여 년 간 통용되었으며 접두사 K로 수렴되는 진흥정책의 산업중심성을 직시하고, 진흥의 대상을 산업에서 향유자로 옮겨야 한다. '돈이 되는 것'이 아니라 '돈을 쓸 수 있는' 향유자와 문화를 진흥해야 한다. 산업진흥에 주안점을 둔 그릇이 산업의 붕괴 앞에서 다른 전환을 꾀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과감하게 그것을 부숴야 한다. 그리고 산업의 이념이 아니라 문화의 이념을 다룰 제도적, 정책적 그릇을 빚어야 한다. 언제까지 K-독립영화나 K-인디 같은 기가 찬 조어를 보고만 있을 것인가?
“예술가를 생존자로 만들 것인가, 시민으로 만들 것인가”
서민우_연극인
자생력을 키우라, 시장에서 경쟁하라지만, 티켓 수익만으로는 공연 제작비조차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결국 출연료를 깎고, 나를 갈아 넣게 됩니다. 지원사업? 늘 불안합니다. 예산 삭감, 사업 종료, 생존의 위협은 반복됩니다. 예술가는 시민입니다. ‘지원’이 아니라 ‘공존’의 관점이 필요합니다. 창작자와 관객을 연결하고, 창작의 어려움을 구조적으로 해결하며, 문화 자체가 삶의 조건이 되는 체제로 전환해야 합니다. 그 안에서 예술가가 존중받는 문화 풍토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입니다. 그래야 예술가도 버티는 것이 아니라 살아갈 수 있습니다.
“자기 꼬리 물기 놀이를 그만 하라!”
세금내는 시민
개가 자기 꼬리를 물려고 뱅뱅 도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다. 개의 입장에서는 뭔가 이유가 있겠는데, 이러한 모습을 보는 입장에서는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하다. 개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은 누구에게 피해를 주지도 않기에 그저 귀엽게 보여도 상관없다.
그러나 정부 부처, 공공 기관 등 공공의 자원으로 존립하고 운영하는 곳에서 개의 꼬리 물기 모습을 보인다면, 그저 귀여운 해프닝으로 볼 수 없다. 그저 스스로를 위로할 뿐인 행태에 지속적인 공공자원이 사용된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문제라고 아니 할 수 없다.
이는 시대에 따라 새로운 판을 만들어 낼 생각도 하지 못하는 지금 문화부의 모습이다. 문화부의 이름 하에 진행된 문화예술정책만 해도 30년이 넘었다. 그동안 문화예술정책은 새로운 시대에 따라 얼마나 진화를 했는가? K-컬처라는 생색내기 좋은 성과 밑에 있는 부조리한 상황과 환경은 별반 변화가 없다. 실재하지 않은 언어 유희는 애써 문제를 감출 뿐이다.
전문가입네 하며 자행하는 것들은 자기 꼬리 물기라는 맴돌음에서 한치도 나가지 못한 것들이다. 이 시대에 맴돌기는 퇴행이다. 차라리 아무 것도 하지 말아야 한다. 맴돌기 놀이하고 싶으면 집에서 놀아라.
“문화다양성으로 차별과 혐오 극복하자!”
송하원_ 공공문화개발센터 유알아트 대표
‘갈라치기’로 일관해온 윤석열 정부가 헌법재판소의 탄핵 판결로 내쳐졌다. 윤석열 정부는 임기 내내 법치를 빌미 삼아 노동자·농민·여성·노인·장애인·성소수자 등 사회적 소수자를 차별하고 억압해왔으며, 동료 시민에 대한 증오와 갈등을 부추겨 사회적 혼란을 조장하였다. 요즘 적지 않은 이들이 저마다의 계산으로 내란에 따른 경제적 피해를 운운하지만, 이 정권에 의해 크게 상처 입은 사회적 다양성과 포용성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앞으로 얼마나 많은 시간과 비용이 투여되어야 할지 알 수 없을 정도다.
문화다양성은 다양한 사회구성원들의 공존과 공생을 보장하고 포용사회로 이르는 길이다. 차별금지법 제정을 비롯하여 문화다양성 가치 증진을 위한 일에 새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하는 까닭이다. 며칠 전, 4·19혁명이 65주년을 맞았다. 최인훈 작가가 『광장』 서문에 적은 “새 공화국에 사는 작가의 보람”이 새롭게 구성될 정부를 통해 온 시민의 보람으로 넓게 퍼지길 바란다.
“공연예술 ‘상품’ 내다팔기 그만. 예술활동 및 생활안정 보장이 먼저다”
심지후_ 연극연출가
문화 진흥 계획에 예술인이 빠져있습니다. AI 활용해서 잘 팔리는 K-컬쳐 만들고 싶어하는 거 알겠는데(저는 그 상품팔이 싫지만) 그 컬쳐 만드는 사람들이 먹고 사는 걱정 덜 하고 예술활동에 집중할 수 있게 만드는 게 제일 중요하지 않나요. 기초적인 생활 보장부터 하십시오. 제가 30대 연극연출가로 살면서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해 요구하는 건 세 가지입니다.
1. 예술창작지원 규모 대폭 확대하라
물가 올랐습니다. 교통비, 임대료, 인건비 다 올랐습니다. 공연 하나 만드는 데 드는 돈도 더 많이 필요합니다. 예술창작지원금 전 영역에 걸쳐 지원 규모 현재의 5배 이상 확대하십시오. 한 공연에 해당하는 금액 늘리고 지원금 수령 인원도 대폭 늘립시다. 부족한 예산은 관광 부문에서 토건자본이 받는 지원액 대폭 줄여서 확보하십시오.
2. 예술인 생활안정보조금 1인당 월 200만원 지급하라
공연 종료 후 창작준비 기간에 생활 보장 필요합니다. 공연 만들면서 까먹은 생활비까지 알바로 채워넣으면서 새 작업 준비하는 거 정말 어렵습니다. 공연 준비 기간에 마냥 놀지 않습니다. 그간 못 봤던 전시, 공연, 영화, 책 보거나 신체훈련 같이 필요한 기술 연마하는 시간입니다. 그 시간이 있어야 다음 스텝의 작업이 가능합니다. 알바하면서 창작 준비하는 거 힘 되게 빠집니다. 예술을 생산하기 위해선 창작 준비할 여력이 보장되어야 합니다. 중앙정부에서 예술인 생활 안정을 위해 창작준비 기간에 예술인 1인당 생활안정보조금 월 200만원씩 지급하십시오.
3. 전국 각지에 공공극장 설립하고 일자리 창출하라. 지역예술생태계 조성, 근본부터 추진하라.
중앙정부가 책임지고 전국 각지에 시 단위로 공공극장 설립하고 운영하십시오. 극장운영 등에 필요한 안정적인 정규직 일자리도 정부가 창출하여 제공하십시오. 지역예술생태계 조성을 위해서는 장기 계획을 근본부터 세워야 할 것입니다. 지역 거주민이 예술에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것이 시작입니다. 공공극장 등 기초예술시설을 마련하고, 시설운영에 필요한 각종 일자리를 정부가 만들어서 사회에 제공하는 것이 지역예술생태계 마련의 출발점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실거주민 중심으로 지역 특성 고려한 운영계획을 논의하고 추진하십시오. 지역예술생태계 운운하며 국립예술단체 ‘통합’해 지역에 졸속 이식하는 거, 지역발전 운운하며 문체부 돈으로 신공항 짓는 거는 당장 관두시구요.
“문화예술 생태계 종다양성을 만드는 돌연변이들을 위하여”
안진나_ 도시야생보호구역 HOOLA 디렉터
어느 새부터 정책은 안 멋지다. 정권이 수차례 바뀌고 새로운 정책를 내놓는 과정 자체가 관료시스템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특수와 보편을 아우르는 긴 호흡의 정책은 부재한 채 단기적이고 분리된 지원구조, 정량적 성과주의, 문화인력들의 소외, 지역의 한계 등이 반복된다.
현장에서 새롭게 등장하는 다양하고 역동적인 이슈를 포용하고 뒷받침하지 못하는 정책의 보수성, 고착화된 행정문법과 생성되는 현장언어의 괴리감을 어떻게 넘어설 수 있을까? 카테고리 속 단위 사업 이전에 존재해야 할 정책은 뭘까? 단발적인, 혹은 기관마다 유사한 지원포맷이 포화상태인 현실 속에서 지원사업 문법체계에 길들여지거나 지쳐 사라지는 문화인력, 단체들을 본다.
변화의 서사를 만드는 변방의 돌연변이들에게도 느리지만 기꺼이 지속가능한 방식을 선택할 수 있고, 우리를 둘러싼 모든 환경에 의미를 두는 사회를 위하여 우린 어떻게 정책이라는 밭을 메야 할까? 지금 우리는 그동안 성장에 익숙했던 사회에서 벗어나 지속가능한 삶을 위한 라이프스타일의 변곡점과 마주하고 있다. 각 지역에서 혹은 지역을 오가며 자신의 문화적 삶을 실험하는 돌연변이들의 문화적 DNA를 탐구하고 이를 통해 문화예술지원사업의 ‘경직성’이라는 약점을 보완할 수 있는 ‘자기-참조’ 조건을 만든다면 어떨까? 기존 지원사업체계가 갖지 못한 독특하고 유연한 체계로써 ‘문화예술’의 영향력과 ‘정책’의 파급력을 갖게 되지 않을까? 특히 지역 문화청년들의 적정생장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어떤 환경과 요소가 필요한지를 들여다보고 문화적 실천으로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만들기까지 어떤 궤적을 밟아왔는지를 톺아본다면 그 안에서 공통된 패턴과 경향성이 발견될 것이다. 이를 바탕으로 생애주기에 기반한 정책디자인 밑그림을 그려본다면 바닥과 현장으로부터 출발하는 정책의 메타문법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부디 지금 어디선가 유예와 잉여의 시간을 보내며 영혼이 자라고 있을 다음 세대들이 박탈감으로 인해 상처입거나 자신이 기여하는 문화의 가치로부터 배제당하지 않기를, 그래서 지역을 떠나지 않고 ‘자신의 지역’으로 누릴 수 있기를. 그런 사회를 만드는 문화예술정책을 만들 수 있기를!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 및 차별금지를 정책목표로”
오온_ 페미니스트 연구 웹진 Fwd 필진
문화체육관광부의 여성 관련 정책은 여전히 ‘양성평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러한 명명은 성차별의 비대칭적 현실을 은폐하는데, 마치 남성과 여성이 동등하게 차별받을 수 있다고 잘못 전제하기 때문이다. 이는 차별의 본질적 구조를 가리고 기계적 평등만을 추구하거나, 더 나아가 차별을 정상화·정당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작년 서울국제여성영화제가 ‘남성 배제’를 이유로 서울시와 영화진흥위원회로부터 예산 삭감을 당한 사건은 이 모순의 명백한 증거다. 더욱이 이 이분법적 용어는 논바이너리, 트랜스젠더 등 퀴어의 존재를 완전히 무화시킨다.
문화예술계에서 여성들과 퀴어들은 주요 소비자일 뿐만 아니라 핵심 노동력이지만, 이들의 노동환경은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제대로 조사되거나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 공연, 전시, 영화, 방송 등 문화예술 전 분야에서 여성·퀴어 노동자들은 성별화된 직무 분리, 임금 격차, 혐오 발언 및 성희롱 등 복합적 차별에 노출되어 있다. 특히 이들 중 대다수는 프리랜서로 일하며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있다. K-팝, K-드라마 등 한국을 대표하는 엔터테인먼트의 경우에도 그 산업적 성과만이 전시될 뿐, 여성·퀴어 프리랜서 노동자들의 노동권은 제대로 보장받지 못하는 실정이다.
따라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차별의 현실을 직시하는 정책이다. ‘양성평등’이라는 허울을 벗고, 여성과 퀴어의 경험에 기반한 문화정책으로 전환해야 한다. 지금 당장 문화예술계 여성·퀴어 프리랜서 노동자들을 위한 구체적 조사 및 지원체계를 구축하라. ‘양성평등’이 아닌 ‘성평등’ 및 ‘차별 금지’를 정책 목표로 명시하고, 문화예술계 내 남성중심적 권력구조를 해체하라. 성차별과 퀴어혐오에 대한 강력한 처벌 기준을 마련하고, 여성·퀴어 노동자들을 위한 독자적 예산과 전담기구를 즉각 설치하라. 형식적 평등이 아닌, 실질적 평등을 향한 이 급진적 전환만이 우리 문화의 진정한 다양성을 보장할 수 있을 것이다.
"문화다양성, 생태계, 문화영향평가"
우지연_ 하루의축 대표
1. 사회 이슈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문화정책 필요
혐오, 극단적 갈등, 기후위기, 지역소멸, 고령화, 사회적 고립 등 사회적 이슈에 대해 보다 적극적으로 문화의 역할을 찾아야 한다. 특히 문화다양성은 왜 하나의 단위사업으로만 이루어지는가. 문화다양성은 문화정책의 기본가치로 가져가야 한다.
2. 지역이 주도하는 지역문화 생태계 활성화
중앙정부가 주도하는 지역문화 정책이 아닌 지역 스스로 결정하고 실행할 수 있는 방향으로 지역문화 생태계 활성화 방안이 다시 필요하다. 지역을 대상화하지 말고 지역에 필요한 것을 스스로 찾고 역량을 축적할 수 있는 생태계가 살아나야 한다.
3. 문화의 사회적 가치 확산을 위한 문화영향평가 확대
현재 문화영향평가는 도시재생이나 문화도시 등 유사사업 중심으로 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는데 다른 정책으로 확대되어야 한다. 다양한 영역에서 문화와 연계한 정책사업들이 점점 증가하고 있는데 이런 정책사업에서 나타나는 문화적 영향의 실체에 대한 확인과 긍정적 영향을 통해 다양한 영역에서 문화의 사회적 가치를 확산해가야 한다.
“연속성 있는 정책을 꿈꾸며”
이동근_ 동네기획자 대표
문화기획자이면서 문화예술단체를 운영하고 있다. 일상의 재미있는 활동을 바라며 기획하지만, 고민과 활동을 지속하기 위한 경제적인 일을 만들고 살기는 참 어렵다. 이런 와중에 매년 된다는 보장은 없어도 지금 하는 활동에 사람들과의 접점을 만들어주는 마중물 같은 사업이 필요하여 공모/기금 사업을 끊을 수가 없다. 마음 한편으로 ‘지원사업을 하고 싶지 않다’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이 지원사업의 ‘목적에 부합하는 활동’을 하는 우리가 아주 적절하다, 라고 마음을 다독이며 컴퓨터 화면 앞에 앉아있었다.
그런 어느 날 어떤 사업은 갑자기 없어지고, 정제되지 않아 보이는 사업들이 갑자기 등장한다. 누구는 멍하니 하늘을 보고, 누구는 쾌재를 부른다.
생각해보면 선거철 무수히 많은 공약들이 날아다닌다. 지난 세월의 사업과 정책은 다 쓸모없고 잘못되었고 다 바꿔야 한다고 한다. 이런 공약들로만 생각해보면 우리 사회가 지금처럼 성장한 것도 신기하다.
24년 겨울에서 25년 봄, 시민들의 목소리가 세상을 바꿨다.
시민들이 기대하는 정책은 삶에 대한 긴 호흡이 있는 정책이다. 5년마다 썼다 지워지는 홍보문구들이 아닌 삶을 고민하는 지속적인 정책을 기대해 본다.
“시민을 위한 시네마테크는 있는가? - 서울시는 서울영화센터 임용에 신중을 기울이고 시민들의 목소리를 들어라”
이재준_ 친구들의 시네마테크 활동가
2020년부터 충무로에 건설 중인 서울영화센터가 드디어 올해 6월에 준공을 마치고 11월 경 문을 열 예정이다. 서울영화센터는 한국의 영화인들이 오랫동안 추진해 온 ‘시네마테크 전용관 건립 운동’의 결실이다.
시네마테크는 무엇인가? 단순히 영화 관람만 기능하는 곳이 아닌 영화의 발굴과 보존, 그리고 연구 및 교육이 이루어지는 복합문화공간이다. 서울영화센터는 여기에 시민에게 열린 공공기관의 역할까지 수행한다. 이제 준공이 완료되면 공간을 운영할 수탁기관과 인원이 선정될 것이다. 이 단계에서 서울시의 세심한 관심이 적극 필요하다.
단순히 단체의 연혁과 업적을 파악하는 데서 그칠 것이 아니라 단체 내 문제 사항과 그 문제를 어떻게 처리했는지까지 살펴봐야 한다. 공공기관이 과오가 있음에도 그걸 해결하지 않고 권위만을 앞세워 침묵으로 무마하려 한다면 묵과할 수 없다. 수탁 기관이 선정되어 운영을 시작한 이후엔 견고한 내규의 제정과 시민의 견제가 필요하다. 특히 성범죄 관련 내규는 관련 우수사례인 재단법인 영화의 전당 내규 '성희롱·성폭력·스토킹 예방 및 피해자 보호·지원에 관한 지침'을 참고하여 제정해야 한다.
서울영화센터는 영화 관계자와 시네필들이 폐쇄적인 소속감을 도모하면서 개방성을 기만적으로 표방하는 닫힌 공간이 아닌, 시민들의 목소리가 전반적인 운영에 반영되면서도 누구나 안전함을 느끼며 방문할 수 있는 한국 최초의 시네마테크 전용관이자 공공성의 공간이 되길 소망한다.
“접근성은 '도착점'이 아닌 '출발점'이다”
이충현_ 조금다른 주식회사 대표
문화기본법 제2조가 말하는 바는 명확합니다. “모든 국민은 성별, 종교, 인종, 세대, 지역, 사회적 신분, 경제적 지위나 신체적 조건 등에 관계 없이 문화를 향유할 권리를 가진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치 않습니다. 이를 지키기 위해 가장 먼저 다뤄져야 할 접근성은 여전히 ‘나중에’, 혹은 ‘하라고 하니까’ 짜투리 예산과 시간으로 해결할 요소로 취급됩니다. 이는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습니다. 접근성은 문화예술의 마지막 단계가 아닌 첫 단계에 있어야 합니다. 기획 회의에서, 예산 편성에서, 공간 설계에서, 모든 시작단계에서 접근성이 핵심 요소로 논의되어야 합니다. 물론 저도, 당신도, 국가도 사정이 있겠죠. 그러나 그 사정보다 훨씬 더 치열하고 중요한 이유를 가진 투쟁이 오랜 기간 있어왔음을 기억하길 바랍니다. 모두를 위한 문화예술은 선의가 아닌 당연한 권리의 실현입니다.
“플랫폼은 웬걸?”
익명
플랫폼은 과실만 따 먹는데, 정부가 나서서 과실만 따먹으려고 하나? 플랫폼은 내 과실이 못나면 남의 과실을 가져다 쓴다. 플랫폼은 과실의 국적을 따지지 않는다. 그런데 플랫폼에 공공자원을 사용한다고? 과실이 잘 열리는 토양을 갖추면 플랫폼은 알아서 나타난다. 공공자원을 쓰려면 토양을 생각해라. 토양이 없으면 과실도 없고 플랫폼도 없다.
“이주박물관을 열자”
제람(강영훈)_ 제주를 기반으로 하는 독립예술기획자
출생률이 줄어드는 한편 이주민은 많아진다. 이주민의 비율이 빠르게 늘고 있다. 등록 이주민 비율이 전체 인구의 5%를 넘어 다문화 사회로 접어들었다. 통계가 헤아리지 못한 미등록 이주민까지 감안하면 더 높겠다. 이런 변화 속도에 비해 한국 사회가 다양한 언어, 문화, 종교, 정치적 배경을 지닌 이주민을 구성원으로 받아들이고 더불어 살아갈 준비를 하는지 염려스럽다.
제도적인 보완만큼이나 비제도적인 대응도 중요하다. 선주민과 이주민이 마주할 수 있는 관계의 장을 마련하는 게 필요하다. 그게 문화가 될 수 있도록 이주민의 삶과 존재를 여러 예술적 방식으로 재현하고 기록하여 전하는 공간이자, 직간접적인 만남을 주선하는 이주박물관을 열자.
인천에 한국이민사박물관은 있다. 과거 한국을 떠나 미주 등지에 자리를 잡은 이들을 기린다. 이번에는 한국을 새로운 삶의 터전으로 삼아 찾아온 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조명할 차례다. 그 장소가 제주라면 어떨까. 전 세계에서 하루에 가장 많은 사람이 항공편으로 방문한다는 곳, 한국에서 유일하게 무비자 정책을 펴는 곳, 그로 인해 내전의 위험을 피해 예멘 사람들이 찾아왔던 곳, 4.3을 겪으면서 생명과 평화의 감수성이 깊은 그곳에 말이다.
‘방심위’라는 틀을 깨자”
조경숙_ 테크-페미 활동가
“불법 사이트 신고하면 차단까지 96.7일”
방송통신심의위원회를 검색하면 상단에 뜨는 기사다. 기사 내용은 불법 복권 사이트에 관한 것이었지만, 다른 불법 유통사이트도 기실 같은 처지다. 현 방심위에서 가장 빨리 차단한 사이트는 지난해 12월 개설되었던 ‘탄핵촉구 문자행동 사이트’ 아니었을지. 작가의 생계를 위협하는 불법 웹툰 사이트도, 피해자가 속출하는 불법 성 착취 사이트도 몇 십일을 족히 기다려야 했던 방심위의 심의는 국회의원을 향한 문자 행동에만큼은 신속하고 즉각적으로 응답했다.
이런 방심위를 대체 어떻게 봐야 할까? 아무리 좋게 평가해도, 지금의 방심위는 ‘정보통신에서의 건전한 문화를 창달’하겠다는 그 목적을 이루지 못하고 있는 데다, 심의와 차단이라는 독자적인 권한을 스스로 무용하게 만들고 있다. 물론 어려움이 있다는 건 안다. 불법 사이트는 매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데, 부족한 인원으로 이를 감당하기엔 시간이 오래 걸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 모두 알지 않는가. 방심위를 그렇다고 이대로 그냥 내버려둘 수도 없다는 것을.
길고 긴 심의 기간도, 일일이 URL과 스크린샷을 붙여 넣어야 하는 방심위 신고 체계도 모두 문제지만, 그 모든 수고를 통과해 겨우 차단된 불법 웹사이트가 겨우 반나절 만에 다시 생겨나는 걸 볼 때마다 자꾸만 무력해진다. 그래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정말 이 방식이 최선인가? 활동가들이 같은 신고를 반복하는 동안, 인터넷으로 돈을 버는 기업들은 무엇을 책임지는가?
절실한 곳에 신속한 차단을, 기업에겐 그만한 책임을, 대개의 경우 감시 없는 자유를 보장할 수 있는 새로운 상상력이 필요하다. 방심위 제도에 대한 깊이 있는 평가와 장기적인 연구를 실시하자. 시민사회, 기업, 공공기관 모두를 불러놓고 토론회를 열자. 방심위라는 틀을 깨고, 우리에게 도착할 수 있는 더 나은 체계를 만들자. 이대로는 갈 수 없다.
“증세 없는 문화정책은 허구다”
천용길_ 나는 예술가와 결혼했다
아내는 1~2월이 바쁘다. 공연도 없는데, 지원사업 신청서 쓰느라. 서류를 통과하면 면접심사를 보러 대구에서 서울까지 올라간다. 문화예술 정책만큼 급변하는 분야는 대북 정책뿐인 듯하다. 그런데 지원금에 절절매면서, 세금 내는 데 주저하는 걸 자주 봤다. 말해야 한다. 우리도 세금을 많이 내고 싶다고. 사회 모든 부문에서 감세가 추진되고 있다. 세수가 줄면 기초예술 지원사업 예산이 먼저 삭감된다. 문화체육관광부 예산은 매년 늘어나고 있다고? K-컬쳐라 불리는 '문화산업' 예산이 늘어난 것뿐이다. 기초예술인 지원사업은 복지 사업이라고 여길 뿐이다. 사회 전반의 증세 없는 문화정책은 허구다. 예술인들이여, 문화정책 대신 증세정책을 요구하자. 우리도 세금을 더 내겠다고, 내고 싶으니 증세 정책 협약을 맺자.
“나는 문화예술 소외계층이다”
최수환_ 화가
가난하다고 문화예술 소외계층이 되는 것은 아니다. 돈이 있다고 향유계층이 되는 것도 아니다. 문화예술의 향유는 시간과 공간의 문제이다. 시간이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경제적 여건이 좋아도 어려운 것이 향유다.
문화예술의 향유가 현대인에게 반드시 필요한 이유는 두 가지일 것이다. 우선 국민(시민)의 정신건강을 위한 가장 저비용의 처방이 문화예술의 향유이다. 우리나라처럼 문화예술종사자의 기본생존이 보장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예술가의 생존을 위한 수단으로 예술의 소비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 방법으로 공적인 향유정책의 시행이 그 다른 하나일 것이다.
이 두 가지가 모두 해결되기 어려운 지역이 농산어촌지역이다. 귀농귀촌한 예술가들의 예술활동과 그 결과물은 지역민들의 향유와 연결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예술가는 활동의 결과물을 도시 향유소비자에게 전달하고 소비시키기 위해 도시로 활동공간을 옮겨야 하는 어려움있다. 농산어촌에서 향유를 희망하는 소비자 또한 그것을 위해 도시의 공간이나 시간을 따라가야 하는 어려움이 상존한다. 도시의 향유소외계층이라고 다르지 않다. 매머드급으로 규모화를 지향한 향유소비공간은 도시인들에게도 적어도 반나절은 허비해야 향유가 가능한 시간 있고 돈 있는 자들의 전유물이 된지가 오래다.
동네마다 작은 규모의 공공 향유공간이 존재해야 퇴근 후 혹은 잠시 짬이 난 시간에 향유소비가 가능할 것이며 이래야 국가 전체의 문화력도 높아지는 것이다. 경제적으로 부익부빈익빈만이 있는 것은 아니다.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는 더욱더 그러한 것이 현실이니 정신적 건강함이 세계 최저수준인 나라의 문화예술정책은 공공향유를 확대하는 길 만이 그 해결책일 것이다.
골목마다 미술전시관이 마을마다 극장이 있어야 문화와 예술이 일상에 살아서 숨쉬는 진정 선진국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농촌에 사는 나도 문화예술향유자이고 싶다.
어촌에서 생활하는 나도 문화예술향유자이고 싶다.
시간 없이 뺑뺑이 치는 도시노동자인 나도 문화예술향유자이고 싶다
“커먼즈 예술가 평의회”
한받_ 전방의예술가, 책방 만유인력 대표
현재의 문화부를 해체하고 현재의 문화를 복속시킨 현행 자본주의 체제를 깨부실 그리고 다가올 체제전환의 과업을 완성할 자립 자발 자조적 커먼즈-예술가 평의회를 제안합니다. 키워드는 ‘자립’과 ‘커먼즈’입니다.
이 땅의 모든 예술가들의 목소리에 귀기울이고 현장의 살아있는 예술가들의 제안을 적극적으로 도입하고 실천합니다. 커먼즈-예술가 평의회 아래에는 전국 자립 예술 펑크 노동자들의 수평 회의 ‘전자펑크노’를 두고 매주 클럽에서 회의를 펼쳐 춤을 추며 정책을 발의하고 입안합니다.
한편으로 자립의 ‘장-운동’ 촉진을 위해 공실 및 공공기관 무단점유 스쾃이 장려됩니다. 자본주의 체제에 널리 승인되고 용인된 지원체계를 하나부터 열가지 다 폐지하고 자립과 커먼즈의 정신을 되살려 아래로부터의 정책을 제안해 입안합니다.
“지역 예술은 문화 식민지다”
한용진_ 문화사회학 연구자
내부식민지론은 한 국가 내부의 특정 지역이나 집단이 중심 권력에 의해 주변화되고 자원을 수탈당하는 구조를 비판하는 개념이다. 한국 사회의 수도권 중심 문화정책은 지역 예술을 ‘문화 식민지’처럼 다루고 있다는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중앙에서 기획된 문화 프로그램과 예산은 지역의 문화적 자율성을 제한하고, 지역은 스스로 창작하고 조직하기보다는 정해진 틀에 맞춰 ‘소비’하는 위치에 놓이게 된다. 이때 지역 예술은 고유한 정체성과 창조력을 갖춘 주체가 아니라, 중앙이 배급하는 콘텐츠의 수용지로 작동하며 문화적 종속 상태에 빠진다. ‘지역 예술’의 내부식민지성은 단순한 예산 문제를 넘어 문화 권력의 불균형을 드러내며 중앙에 종속되는 ‘지방 예술’에 머무르게 된다.
지역문화진흥법은 지역문화 활성화를 목표로 하나, 실제로는 중앙 정부가 정책 방향과 예산 배분을 결정하는 구조이다. 지역은 자율적 기획이 아닌 공모 형식에 따라 중앙의 평가 기준에 맞춰 기획을 조정해야 한다. 지역의 고유한 문화 예술 생태계를 조성하기보다는 중앙 정부의 기분에 맞는 ‘프로젝트형 소비’로 변질되고 있다. 문화도시 사업 역시 중앙 정부(문체부)주도의 하향식 구조에 종속되고 있다. 지역은 본 도시로 선정되기 위한 경쟁에 집중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지역 고유의 문화는 ‘팔릴 만한 스토리’로 포장된다. 결국, 지역은 고유한 창작의 공간이 아니라 전시용 문화 소비지가 되어간다. 지역에서 시작된 실험과 창의성은 묻히고, 문화 예산은 특정 도시에만 집중된다. 생활문화센터 조성사업 또한 공간은 생기지만 운영 자율성과 지속가능성 측면에서 한계가 크다. 공공시설 리모델링 등 하드웨어 중심의 지원으로 인해 건물은 생기지만 운영예산이나 인력확보는 지역 자치단체에 떠넘김으로서 문화 자원의 불균형만 더 부각되고 있다. 이러한 정책 구조는 지역문화를 독립적 주체로 인정하기보다 중앙 통제 하의 ‘문화 수혜지’로 고정시키며, 문화예술 영역의 내부식민지성을 심화시킨다.
이제는 틀을 깨부숴야 한다. 첫째, 문화정책의 설계와 실행 단계에서 지역이 실질적인 기획 주체가 될 수 있도록 법적·제도적 권한을 분산시켜야 한다. 공모 중심의 일회성 지원이 아니라, 장기적인 예산 배정과 기획 자율성이 보장된 지역 중심의 문화재단 운영 모델이 필요하다. 둘째, 문화의 가치 기준을 수도권 중심의 고급문화에서 벗어나, 지역의 생활문화와 민중예술을 동등한 가치로 인정해야 한다. 이를 위해 중앙은 지원자의 역할로 후퇴함으로써 문화 권력구조를 해체하고 지역이 문화 주권을 행사할 수 있어야 한다. 셋째, 지역 간 문화 협력 네트워크를 확대하여, 서울을 중심으로 한 일방향 유통 구조에서 벗어나 다중 중심의 문화 흐름을 형성해야 한다.
진짜 변화는 중앙이 물러나는 것에서 시작된다. 지역이 예산과 기획, 실행까지 직접 쥘 수 있어야 하며, 외부 평가에 맞추는 공모사업은 끝내야 한다. 예술은 보여주기 위한 게 아니라 살아 있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자라는 것이다. 지역은 스스로 기획하고 스스로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예술은 권력으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문화는 선별적으로 나눠줄 수 있는 시혜가 아니다. 우리가 진짜 문화 민주주의를 원한다면, 먼저 이 나라의 문화 식민지를 해방시켜야 한다. 지금은 질문할 때가 아니다. 지금은 행동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