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 탄핵 이후] 닿을 때까지(김영글)
지난 겨울, 오랜만에 돛과닻의 신간을 내서 서점 입고 관리며 북토크 행사 준비며 할 일이 많았다. 1인 출판사를 운영한 지 햇수로 5년 차가 되었지만,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처리해야 하는 상황은 여전히 힘에 부쳤다. 그날도 가성비 떨어지는 노력을 대충 갈무리하고 밤늦게 귀가한 참이었다. 이런 밤이면 자신이 하는 일의 가치와 전망에 대해 비관적이 되게 마련이다. 의기소침해져서는 무거운 몸을 침대에 던졌는데, 친구가 보낸 메시지에 두 글자가 떴다. 계엄. 지난 몇 년간 들어본 것 중 가장 비현실적인 단어였다. 잠이 달아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계엄 포고령 제1호가 뉴스에 떴다. 집회, 시위 등 일체의 정치 활동을 금한다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포고령은, 시대착오적일 뿐 가짜뉴스가 아니었다. 그리고 제3항은 이것이었다. “모든 언론과 출판은 계엄사의 통제를 받는다.”
계엄이 선언된 12월 3일 이전에도 문화·예술 영역의 형편이 그리 녹록지는 않았다. 윤석열 정부 들어 도서·출판 산업 예산은 줄줄이 삭감되었고, 출판계 블랙리스트 논란에다 김건희 씨가 참석한 서울국제도서전 행사장에서 예술인들이 강제로 퇴거당하는 등 사건 사고도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노골적으로 명문화된 퇴행까지 목도하자니 적잖이 충격이었다. 이후 '출판하는 언니들'이 초안을 쓴 출판인 성명문에는 저 문장의 존재가 우리를 “부끄럽게”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그 부끄러움이 “분노가 되어 우리를 움직이게” 한다고도 적혀 있었다. 확실히 그랬다. 뭔가 단단히 잘못된 시대를 살고 있다는 수치심과 분노가 우리를 동요하게 했다.
나도 몇 차례 광장에 나갔다. 분노한 채로. 그런데 돌이켜 보면, 분노는 한 사람이 광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감정 중 일부에 지나지 않았다. 한쪽 무대에서 성폭력 가해자를 두둔했던 남성이 공식적으로 마이크를 쥐면, 다른 한쪽에서는 퀴어 여성이 자발적으로 발언대에 올라 눈앞에 뻔히 있는 존재를 지우는 광장의 편견과 무지를 비판했다. 청소년, 장애인, 백수, 농부, 오타쿠, 희귀 질환 환자가 스스로를 호명하며 개인의 삶을 이야기했다. 8년 전의 대중집회와는 또 조금 다르다는 느낌이 들었다. 광장은 속 시원하고, 웃기고, 벅차오르고, 낡고도 새롭고, 무섭고도 애달픈 공간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할 수 있는 걸 했다. 자신이 가장 소중히 여기는 것을 들고나가 어둠을 밝혔고, 대오의 맨 앞에서 경찰 병력을 몸으로 밀어 길을 냈고, 잘 모르는 세대의 노래를 떠듬떠듬 배워 불렀고, 트랙터를 끌고 국회를 향해 돌진했고, 얼어붙는 추위에도 아스팔트 위에서 농민들의 곁을 밤새워 지켰고, 그 광경을 집에서 인터넷으로 지켜보다 두 다리 뻗고 잠들기가 미안해 방한용품과 배달 음식을 보냈다.
계엄과 탄핵이라는 회오리바람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물론 상흔도 남았다. 막연한 희망이나 연대라는 아름다운 말로 다 가릴 수 없는 공동체 내부의 균열이 광장 한가운데서 드러났다. 그러나 균열을 들여다볼 시간을 비로소 마련한 것도, 계엄 이전이나 이후나 고통받는 삶들은 달라지지 않는다는 외침을 함께 아로새긴 것도 광장이었다.
이번 탄핵 정국을 거치며 직간접적으로 겪은 광장의 경험이 나에게는 뜻밖의 동기부여가 되어주기도 했다. 글씨도 화법도 제각각인 피켓들, 크기도 색깔도 다른 깃발들, 색색의 야광 빛이 만드는 파도, ‘나’와 ‘너’의 시간을 넘나들며 울려 퍼지던 노래, 그 모든 것이 일종의 희미한 신호, “나에게도 이야기가 있다”는 선언이었다. 이렇게 많은 목소리가 잠시라도 마이크를 필요로 하는 세상에서, 이야기를 꾸준히 길어 올리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광장에 서면 들곤 했다.
“나에게도 이야기가 있다”는 선언
독립출판의 기원을 찾아보면 20세기 초 해적 라디오의 사례를 드는 경우가 있다. 초기의 해적 라디오는 소수의 개인이나 공동체가 자체 주파수로 방송을 송출하던 시도였다. 정부나 대기업의 통제를 받지 않고 하고픈 말을 퍼뜨리기 위해 어떤 사람들은 스스로 송신기와 안테나를 세웠다. 책을 만드는 일도, 상품을 제작하는 일이기 이전에 종이라는 사물에 인쇄된 이야기가 어디까지 이동할 수 있을지, 어떤 삶과 만날 수 있을지 실험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독립출판을 한다는 건 원래 틈새를 걷는 일이다. 주류 매체가 다루지 않는 이야기, 대형 출판사가 손익계산 때문에 선뜻 내지 못하는 기획, 보이지 않는 것들을 수면 위로 끌어올리려는 일견 무용해 보이는 시도. 그러한 것들을 향한 의지와 열망이 이 이상한 산업을 지탱해 왔다. 문득 나의 시작을 돌이켜 보았다. 규모와는 무관하게 언제나 독립출판의 이름으로 책을 만들리라 다짐했던 처음의 마음으로부터, 지금 나는 얼마만큼 빗겨나 있는지.
기다리던 파면 인용이 선고되던 날, 제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봄이면 열리는 제주북페어에 참여하기로 되어 있었다. 두어 해 전부터 나는 기회가 닿는 한 북페어에 나간다. 바깥에서 부스를 지키며 책을 파는 건 퍽 고단한 일이지만, 그래도 지역의 독자들을 만나는 시간이 값지다는 사실을 여러 차례 경험했기 때문이다. 이번 북페어에서는 한 선생님을 만났다. 남자 고등학생들을 가르친다는 그 선생님은, 돛과닻이 3년 전에 낸 『제로의 책』을 가지고 있다며, 그 책으로 학생들에게 모둠별 토론을 시키곤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러잖아도 나는 그즈음 『제로의 책』에 수록된 글 한 편을 자주 생각하고 있었다. 그 글에서 정치학자 채효정 님은 기존의 지배 언어에 기대지 않고 벌여나갈 수 있는 예술적 실천이 바로 “이야기의 싸움”일 거라고 썼다. 전문가들의 손에서 가공된 정보보다 당사자들의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이웃들의 이야기와 우리들의 이야기, 그것이 곧 나의 일임을 말해줄 이야기가 필요하다고 말이다.* 기후위기의 맥락에서 쓰인 글이지만, 곱씹을수록 이것이 우리가 마주하는 난관들 앞에서 복기해야 할 통찰일 거라 믿게 된다.
* 채효정, 「이것은 상상력의 싸움이다」, 『제로의 책』, 돛과닻, 2022, 195쪽.
한국 사회는 내란의 우두머리를 체포하고 탄핵 인용에 이르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광장의 힘, 시민들이 일구어낸 이야기의 싸움 덕분이었다. 하지만 광장의 시간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망상과 음모론으로 점철된 극우 세력이 물러난 자리에서 균형이니 잘사니즘 따위의 또 다른 허황한 언어를 듣고 싶진 않다. 역사의 비극이 반복되지 않으려면 바꿔야 할 게 여전히 절망적으로 많다. 하지만 우리가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하며 삶의 도처에서 작은 광장들을 계속 만들어 나간다면, 이다음을 도모하는 것이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책에도 할 일이 있다고 믿는다. 조심스레 주파수를 맞추고, 천천히 움직이며, 많이 팔리지는 않더라도 누군가 필요한 사람에게는 분명 가 닿을 이야기. 작지만 또렷한 목소리. 그런 책을 짓기 위해 내일도 애써 보겠다.
김영글. 작가. 독립출판 돛과닻 대표. 텍스트와 이미지, 영상과 출판을 아우르며 활동해 왔다. 주로 이야기를 새롭게 직조하면서 역사적ㆍ사적 자료의 ‘다시 읽기’와 ‘다시 쓰기’를 시도하는 작업을 했다. 지은 책으로 『사로잡힌 돌』, 『노아와 슈바르츠와 쿠로와 현』, 『모나미 153 연대기』, 『남의 노래』(공저) 등이 있다. 2019년부터 운영하고 있는 출판사 돛과닻의 사훈은 “멀리 그리고 깊이”. 장르의 경계를 항해하며 인간의 마음을 탐구하는 책을 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