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②] “이른바” 3S정책1: 유신이 억압하고 있던 것들
편집자 주: “사건과 논쟁으로 돌아보는 한국 문화정책” 기획연재를 시작합니다. 이번 연재는 한국 문화정책의 지형을 두텁게 그려보고자 마련되었습니다. 사건과 논쟁에 대한 입체적 복기를 통해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현재의 기원을 살피고자 합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박정희 대통령이 사망한 시점인 1979년 10월부터 1980년 5월 사이 전두환은 12.12사태 등의 군사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고 제5공화국을 출범시켰다. 2023년 현재를 사는 이들에게는 이 과정이 매우 낯선 상황일 것이다. 하지만 40, 50년 전 한국은 지금과 매우 다른 나라였다. 1948년에 정부 수립이 이루어졌지만 불과 2년 만에 한국전쟁이 벌어졌고 1953년에나 전쟁이 멈췄다. 가뜩이나 신생 국가라는 한계가 뚜렷했는데 거의 곧바로 전면전 형태의 내전을 겪었기 때문에 산업적 기반도 처참하게 무너졌고 국민들의 교육 수준을 포함한 인적 자원도 매우 부족했다. 1950년대의 한국은 그야말로 농업 등 1차 산업에 의존하는 전형적인 후진국이었다. 정치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1948년 정부 수립부터 민주공화국의 형태를 외형적으로 취하고 있었지만 제도적 민주주의를 뒷받침할 물적 토대는 허약했고 사회적 인식도 충분하지 못했다. 대통령 이승만과 자유당을 중심으로 한 제1공화국의 정치적 파행은 4.19혁명을 불러왔지만 정권을 넘겨받은 민주당 정부도 그 기반이 허약했고 민주공화정을 끌고 갈 현실적 능력이 부족했다. 그래서 군사정변이 벌어졌는데 이런 것은 한국에서만 벌어진 특수한 상황이 아니었다. 세계2차대전 이후 성립된 아시아 아프리카 후발국가들은 대부분 군부 독재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다.
시각에 따라 다양한 해석과 평가가 가능하다는 단서를 붙여야겠지만, 한국은 2차대전 이후 건국한 신생 국가 중에서는 드물게 1960년대 이후 경제적 고도성장에 성공한 모델이다. 단적인 예로 1960년 한국의 수출은 3,300만 달러로 세계 112위였고 수입은 3억 4,400만 달러로 세계 59위였다. 1964년 수출 1억 달러를 달성했을 때 세계 수출 89위였고 1인당 GNP는 103달러였는데 당시 에티오피아, 카메룬, 튀니지와 비슷한 수준이었다. 같은 시기 필리핀이 수출액 7억 달러였다. 박정희 정부는 바로 1964년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수출드라이브 정책을 펴기 시작했는데 그 결과 1969년엔 수출액 6억 달러를 넘어서며 세계 50위권 국가가 진입했다.(57위) 1970년대에는 10월 유신을 선포하고 정치적으로는 민주주의를 극도로 억압한 상황에서 수출주도정책을 가속화했다. 특히 1960년대 산업화와 무역이 주로 경공업을 중심으로 했다면 1970년대에는 제철과 석유화학, 조선 등 중화학공업으로 산업개편을 밀어붙였고 그 결과 1979년에는 수출 150억 달러(20위) 수입 203억 달러(16위), 무역총액 353억 달러(16위)에 이르는 중진개발도상국가로 진입하기에 이른다. 불과 20년 동안 경제적으로 세계 100위권 국가에서 20위권 안에는 국가로 성장한 것이다. 글 시작 부분에 언급한 전두환 집단의 제5공화국은 이런 시대적 배경을 전제로 하고 있었다. 경제적으로는 고도성장이 어느 정도 이루어진, 그러나 정치적으로는 도저히 정상적인 민주주의 국가로 볼 수 없는 통제적 권위주의(독재) 정권, 군부 독재자 출신 대통령이 암살당했고 민정 이양과 민주화에 대한 기대가 잠시 있었지만 결국 또 다른 군부권력자가 총칼로 정권을 탈취해 가는 정치적 미성숙 상황. 그러나 이미 성장한 국민들의 생활 수준과 의식으로 인한 정권의 불안정성이 정부 초창기부터 두드러졌던 것이 제5공화국이 출범했을 당시의 모습이었다.
유신이 억압하고 있던 성장의 결실들
5공화국의 출범 당시 상황을 제법 길게 복기하는 것은 이른바 “3S정책”이라 불렸던 5공화국 문화정책을 논하기 위해서는 이런 상황들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이른바” 3S정책이었다는 점이다. 3S정책이란, 당연한 얘기지만 5공화국의 공식적인 문화정책이 아니었고, 당시의 정부 문화정책을 비판하는 입장에서 S로 시작하는 세 단어 스크린(Screen), 스포츠(Sports), 섹스(Sex)의 머리글자를 딴 것이었다. 영상미디어를 중심으로 한 대중문화, 스포츠 이벤트, 퇴폐향락풍조를 조장하여 신군부에 대한 국민들의 정치적 불만을 우회시키는 문화정책을 펼쳤다는 것이다. 3S정책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심도 있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대통령 기록관에도 3S정책이란 명칭으로 기록될 정도로 민주화 이후 공식적 표현으로 굳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당시 정부에 3S정책이 실제 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존재한다. 일단 공식적인 정부의 정책이 아니기도 했거니와 어떤 유기적인 연결성을 갖고 그런 정책 드라이브를 걸었던 흔적도 찾아지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5공화국이 1980년대 초반 펼쳤던 일련의 사회문화적 조치들이 소위 3S로 해석될 수 있는 여지들을 제공했을 따름이다.
스크린, 스포츠, 섹스를 묶어서 3S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한 것은 사실 훨씬 이전부터였다. 1960년대 초반에도 언론정책의 일환으로 같은 의미의 3S정책에 대한 언급이 논설에 등장하고 있고 일본의 프로스포츠 발전 과정을 다룬 1975년 언론기사(“일본 31년 요미우리, 美팀 초청이 기폭제, 패전을 통한 상처 경기를 통한 순화정책 주효”, 동아일보 1975년 3월 29일)에서도 일본이 1945년 패전 이후 프로야구, 프로레슬링 등의 3S(스크린, 스포츠, 섹스)정책을 통하여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웠다는 내용이 다뤄지고 있다. 1970년대까지 3S정책이란 표현은 주로 1945년 패전국 일본에서 미군정과 일본 정부가 민심을 다독이기 위해 펼쳤던 정책을 지칭하는 것이었고 딱히 부정적 함의가 큰 표현도 아니었다. 당장 1975년의 기사만 해도 일본이 3S정책을 통해 국민들의 상처를 무난하게 치유하고 선진국으로 가는 동력을 만들었다는 식의 표현이 사용되고 있다. 이것이 한국정부의 문화정책에 대한, 부정적인 의미의 용어로 쓰이기 시작한 것이 정확하게 언제쯤인지는 기록으론 확인하기 힘들다. 하지만 공식석 상에 등장한 기록은 찾을 수 있는데 1983년 국회 대정부질문에서였다. 당시 군소야당이었던 민권당의 김정수 의원은 정부의 교육, 사회문화, 노동복지정책에 대해 전반적으로 매우 비판적 입장을 보였는데 스포츠 정책에 대해서는 “국민은 참여스포츠시대를 결별하고 프로관람시대에 살고 있다. 이것은 정치적 무관심을 조장하려는 전형적인 3S우민정책이 아닌가?”라는 날선 질문을 던졌다. 국회의원의 대정부 질문에서 저렇게 활용될 정도였다면 그것은 이미 대학가를 포함한 운동권 담론장에서는 그 이전부터 5공화국의 문화정책에 대하여 부정적 의미의 3S로 받아들이고 있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런데 여기서 다시 한번 확인되는 것은 3S정책이란 개념이 정책을 생산하고 집행하는 쪽이 아니라 정책의 대상이 되고 받아들여지는 쪽에서 생성되었거나 재의미화된 개념이었단 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수용될 만한 정황이 있었던 것도 분명히 존재하긴 했다. 당시 대표적인 3S 정책으로 받아들여졌던 정책들을 나열해 보면 다음과 같다.
스크린(영상문화) | 1980년 컬러텔레비젼 방송 송출 시작, 1981년 영화검열기준 완화, 1981년 “국풍81”개최 및 방송, 1982년 심야영화상영 허용 |
스포츠 | 1981년 88올림픽·86아시안게임 유치, 1982년 프로야구리그 출범, 1983년 프로축구, 민속씨름(프로씨름) 출범 |
섹스(성산업) | 1982년 야간통행금지 철폐 |
막상 열거해놓고 보면 “○○정책”이라고 명명하기엔 좀 무색한 측면이 있는 게 사실이다. 그리고 각각의 정책을 살펴보면 국민들의 정치적 무관심을 유도하려는 정권의 우민화 정책으로만 보기 힘든 측면들이 있다.
우선 스크린 정책으로 거론된 컬러텔레비전 송출의 경우를 예를 들어 살펴보자. 이미 1970년대 중반부터 텔레비전을 생산하던 가전회사와 방송업계에서 강력하게 요구하던 사안이었다. 미국에서는 1950년대에 컬러 방송이 이뤄지고 있었고 일본에서도 1960년대에 컬러방송을 시작했다. 심지어 중국은 1973년에, 북한은 1974년부터, 베트남은 1978년부터 컬러 방송이 이루어졌다. 한국의 경제성장이 1960년대 중반 이후 급격히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컬러 방송 송출이 늦어진 것은 이해가 되는 측면이지만 1970년대 중반부터는 방송계에서 이미 컬러방송 송출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고 컬러텔레비전 생산도 이루어지며 수출 품목에 포함되어 있었다. 산업계를 중심으로 한 컬러 방송에 대한 요구를 억누르고 있었던 것은 박정희 정부였다, 1970년대 중반 흑백텔레비전 보급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일부 도시 부유층의 전유품이던 텔레비전이 도시 중산층은 물론이고 농촌 지역까지도 어느 정도 보급이 이루어졌는데 바로 거기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서 컬러텔레비전을 보급하면 계층 간의 위화감을 조장할 수 있다는 게 한 가지 이유였다. 그리고 또 한편으론 신문 등의 전통적인 매체들이 컬러텔레비전 도입 등으로 당시 뉴미디어였던 방송 영역이 급성장하는 것에 대해 견제했던 탓도 있다. 지금이라면 산업계의 요구를 정부가 일방적으로 묵살하기 힘들었겠지만, 당시는 유신체제였다.
이런 상황에서 등장한 5공화국이 컬러텔레비전을 허용했던 이유를 다음 3가지 측면에서 볼 수 있다. 우선 더 이상 산업계나 방송계의 요구를 묵살할 수 없었고, 문화적으로 통제일변도였던 유신정권과는 “시각적”으로 차별화하고 싶었고, 그리고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는 미국의 통상압력이라는 대외적 변수다. 앞서 언급했듯 1970년대부터 국내에서는 컬러텔레비전이 생산되고 있었다. 내수는 금지되었지만 1977년 12만 대, 1978년 50만 대 가량이 수출되었고 대부분은 미국 시장에서 팔렸다. 그런데 1978년부터 미국의 통상 대표들은 “한국이 자기들은 내수로 소비하지도 않는 텔레비전을 만들어서 남에게 팔고 있는데 이것은 국제적 상거래 질서를 어지럽히는 것”으로 비난하며 1979년 한국산 텔레비전의 수입을 연간 30만 대로 제한해버린 것이다. 수출의 길이 제한되어버리니 가전업계의 요구는 더욱 거세졌고 정부 입장에서도 컬러텔레비전 도입을 더 이상 늦출 수 없는 상황에 직면했던 것이다.
컬러텔레비전 도입을 단적인 예로 들었지만 프로스포츠리그 도입의 경우도 전두환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장했다기보다는 이미 1970년대 중반 이후 각각의 스포츠 분야에서 조심스럽게 시도되거나 제안되었으나 유신정부에 의해 통제되고 있던 것들을 “허용”이라고 볼 수 있다. 프로야구리그 도입만 해도 이미 1976년 기사(“프로야구 내년 창설” 동아일보 1976년 2월 6일)에서 1975년에 한국프로야구추진위가 설립되었고 1980년까지의 5개년 계획을 갖고 추진할 것이란 내용이 등장한다. 당시 기사에 따르면 프로야구추진위는 1977년을 목표로 전국의 도청소재지를 연고지로 한 6개 구단 체제의 양대리그(동해리그, 서해리그)를 만들고 1978년에는 서울과 전주(전북)에 2개팀을 더 만들어서 88개 구단 체제를 완성하며 1980년에는 일본프로야구와 합작한 동북아 리그로 발전시킬 계획을 밝히고 있다. 이 계획의 앞부분은 1982년 급조된 것으로 알려진 한국프로야구리그의 초창기 모습과 매우 닮아있다. 1970년대 중반 한국프로야구 리그의 창설에 대한 요구는 우선 경제성장으로 인한 프로스포츠 리그 운영을 위한 물적 토대가 어느 정도 갖춰졌고 지역연고를 중심으로 한 고교야구가 엄청난 인기를 끌고 있던 데에서 비롯된다. 이 정도 경제적 기반과 지역 기반 고교야구의 폭발적 인기라면 지역연고의 프로야구 리그가 자생력을 갖추고 사업성을 갖출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유신정권은 프로야구 리그를 도입하기 위한 사회적 비용(무엇보다 라이트 시설 등 구장 개선과 유지에 천문학적 돈이 들어간다는 판단이 있었다)을 감당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를 묵살했다. 프로야구 도입을 가장 앞장서서 주장하며 5개년 계획인 '한국성인야구재건안(한국직업야구계획)'을 만들었던 재미사업가 홍윤희는 낙담한 채 미국으로 돌아갔고 그에 의해 수립된 계획이 1982년의 시점에 현실화된 것이다. 신군부에 의해서 말이다.
세월이 흐르고 이런 정황들이 드러나면서 5공화국의 3S정책이 실재했는가에 대한 질문이 던져지기도 한다. 특히 자유기업원을 중심으로 한 극단적 우파 진영에서 “3S정책이란 80년대 진보운동권에서 이데올로기적으로 조작하여 주장한 허상”이란 논리를 최근 지속적으로 펴오고 있다. 다음 지면에서는 3S정책을 통한 우민화의 주요한 논지들과 그것을 부정하는 입장들을 살펴보고 그에 대한 다층적 측면을 검토하고자 한다. 그리고 80년대 3S로 표상된 정책 현상이 현재의 문화적 상황과 정책에 남긴 영향과 흔적도 함께 다뤄보고자 한다.
----------
염신규.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소장, 인천대학교 문화대학원 겸임교수. 20세기가 끝나갈 무렵 문화예술분야에서 발을 들여놓았으며 창작자, 기획자, 정책활동가 등 깊이 없이 다방면으로 경험을 쌓았다. 최근에는 문화정책(제도) 연구와 문화 연구의 틈새를 메우기 위한 작업들을 고민하고 있다. 특히 관심 있는 분야는 국민국가 성립 과정에서의 문화적 제도화의 문제, 노동자 문화정체성에 대한 비전형적인 방향에서의 탐색 등을 고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