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개혁의 실패 혹은 덧없음
아무래도 신임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구성 문제는 찻잔 속의 논란이 될 듯하다. 최초의 정치인 출신 위원장이 탄생한 것이 가지고 있는 부정적인 의미에도 불구하고, 이를 둘러싼 논의는 쉽게 사그라들었다.. 지난 칼럼을 통해서 이번 위원회 구성에 대한 우려는 충분히 제시되었다.(“한국문화예술위원회 파국, 호선제 복원 첫 위원장에 정치인 선출”) 이 글은 신임 위원회 구성 상의 한계를 재차 강조하는 것보다는 그런 현상을 수용하는 맥락에 초점을 맞춘다. 그러니까 하나의 현상을 이상현상으로 수용하는, 혹은 수용하지 않는 계(world)의 문제를 주요한 논제로 한다. 무관심, 방관, 두고 보기, 수동적 수용 등 현 상황을 설명할 수 있는 조건을 살펴보지 않고서는 일방향적인 편견이나 오해가 강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제도의 선의가 관철되지 않음
가장 일반적인 정서라면 어쩔 수 없음에 대한 인정이다. 정권이 교체되면 당연히 공공기관의 대표들은 자연스럽게 전리품으로 전락한다고 생각한다면,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구성이 기대와 달리 뒤떨어지더라도 그것은 정권의 속성이자 한계일 뿐이지 그 자체로 큰 문제가 될 것은 아니라고 받아들이게 된다. 더 밀어붙이면 지난 정권 하에서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역시 그러했다는 취지로 정당화되는 이해다. 우리가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대해 이런 상황을 납득하게 되면, 블랙리스트 이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개혁을 위해 추진했던 다양한 시도들 -현장소통위원회의 구성, 문체부와의 자율경영 협약 체결 등-은 정권 교체로 인해 시효를 다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렇다면 대체 위원회 전환 당시에 표방했던 그리고 블랙리스트 이후 회복 혹은 제대로 정립하겠다고 했던 ‘자율적인 예술기구로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라는 상 자체가 허상이었다는 것을 자인하는 것이 아닌가. 만약 여전히 자율적인 예술기구라는 이상형이 유효하다고 생각한다면, 왜 제도 개선에도 불구하고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졌는지 짚어봐야 한다. 이를테면 호선제라는 방식이 위원장에 대한 정무직 공무원의 통제를 회피하기 위한 수단이었음에도 왜 실제 그 효과를 볼 수 없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특히 이력이라곤 정치인밖에 없는 이가, 적어도 정책 현장에서 상당 기간 멀어져 있었을 것이 분명한 사람이 다양한 예술계의 인사들로부터 위원장으로 선출되는 건 매우 흥미로운 사건이다.
이에 대해 인적 구성의 특징으로부터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그보다 주목해야 하는 것은 전직 정치인 출신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장의 필요성 자체다. 지난 1월 10일 신임 위원들이 참여하는 임시회의에서 정병국 신임 위원장이 호선으로 선출되었지만, 1달이 지나도록 임시회의 회의록이 공개되지 않고 있다. (2022년의 경우 통상적으로 위원회 회의가 열리고 15일 이내에 경영공시 페이지 상에 공개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따라서 신임 위원들이 왜 정치인 출신의 위원장을 호선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해당 위원들이 그에 대한 의견을 공개적으로 피력한 사실도 없다. 애당초 호선제라는 것은 내부적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절차임에도 ‘왜 그 사람이 위원장이 되어야 하는가’라는 점에 어떤 정당성도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상황이다.
이런 상황은 결국 호선제라는 것이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지배구조에 최소한의 자율성을 보장하는 장치가 될 것이라는 선의가 작동되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호선제가 짬짜미 위원장 선출로 오히려 위원장의 정당성에 구멍을 만들어낸 것이라 볼 수 있다.
작동 잘하는 정책자판기
현재 상황을 좀 더 적극적으로 해석해 보자. 사실 위원회의 독립성이나 자율성이라는 것이 그 자체로 중요한 목적이라기보다는 각종 보조사업을 수행하는 수단이나 요건에 불과했던 것이 아닐까. 왜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독립성과 자율성이 중요하냐고 묻는다면, 그것이 예술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보장하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이자 표시이기 때문이라는 답보다는 예술지원 사업에 있어서 공정성 시비의 안전장치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더 현실적인 답이 아닐까. 그렇다면 블랙리스트 문제는 지원 배제의 현상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지원 배제가 나타날 가능성을 축소하는 정도여도 무방하다는 것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게 되고 블랙리스트의 문제는 예술지원사업의 무리 없는 집행으로 국한될 뿐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인 표현의 자유와 예술인의 자율성 문제는 부차적이거나 등장하는 것이 어색한 주제가 될 뿐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기존에 해왔던 각 장르별 예술지원 사업을 잘하면 되는 기관이지 구태여 예술인들의 기구일 필요도 없고 무엇보다 표현의 자유라는 사회적 권리의 보루일 필요도 없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위원회의 위원들이 누구로 구성되는가하는 것은 딱히 논란거리가 되지 않는다. 시간이 흘러 이들이 특정 장르의 사업을 조정하거나 지원사업 구조를 변경할 때에 이르러 관심이 촉발될 것이다. 그것은 적어도 안정적이라 생각하는 지원사업이 보장되는 한에서 어떤 형태의 위원회 구성이든 핵심적인 문제로 등장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게 한다. 사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대다수 이해당사자들은 예술인 보조사업자이지 다양한 현장에서의 경험적 사실을 바탕으로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는 시민이라는 정체성과 역할을 자각하고 있는 예술인이라 보기 힘들다. 사실 이렇게 구조화된 데에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각종 공론화 과정이 한국의 예술계 내에서 구속력 있는 합의로 만들어진 적이 없다는 것에 기인하다. 한번도 앞서가는 예술정책의 비전이나 예술의 역할이나 가치에 대한 합의 기구로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를 경험한 적이 없다. 그렇다고 예술인에 대한 배타적인 옹호기구로서의 역할을 적극적으로 한 전례도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블랙리스트라는 것은 그나마 캔 음료를 잘 뱉어냈던 자판기의 고장 이상의 의미도 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러니까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 대한 일반적인 무관심은 무엇 때문인가라는 질문은 예술인에게 물어야 할 것이 아니라 지난 역사에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무엇을 지향했던가라는 스스로의 해명에서 답을 구해야 할 것이다.
명예직 위원회
제도 혁신의 선의가 작동되지 않는 것은 시스템으로서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망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예술인들에게 정책자판기 정도의 기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기관의 필요성이 손쉽게 다른 기구로 전환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니까,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구성은 위원회가 가지고 있는 위기 상황을 가장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실례다. 그리고 이는 당연히 문화체육관광부의 의도가 작용한 결과다. 현재 위원들은 모두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임명한 이들이니 말이다. 당연히 8기 위원들의 문제란 문화체육관광부 관료들의 문제일 뿐 그 이상의 의미는 없다. 다행스럽게도 이번엔 임원추천위원회이건, 위원 후보이건 ‘당신들이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렇다’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적어도 다양한 연령의, 다양한 예술인들이 낙관적이지 않은 상황에도 이 절차에 참여했기 때문이다. 지금의 결과는 그들 중 일부를 선별한 ‘문화체육관광부 관료’에 의한 것으로 충분히 자의적인 기준들이 작동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을 뿐이다.
원인이 문화체육관광부라면 그것의 배경이 되는 것은 도대체 위원회의 위원이 무엇을 할 수 있는가라는 좀 더 본질적인 질문이 닿아 있다. 현재 위원회의 위원들이 행사할 수 있는 형식적인 권한은 매우 크다. 하지만 실제로 활용할 수 있는 실질적인 권한은 매우 작다. 전자는 일정한 조건이 충족될 경우에만 행사가 가능한 조건부 권한에 가깝고, 실제로는 실질적인 권한 위를 가볍게 스치는 명예직에 가까운 권한을 행사한다. 무슨 말이냐면 의견을 제시하는 권한과 별도로 결정과 집행 과정에서의 권한이 체계적으로 배제된다는 뜻이다. 세부적인 사업의 조정이 부적절한 것이라면 사업집행의 방향성은 결정할 수 있어야 하지만, 언제나 문화체육관광부의 정책방향이라는 힘과 이전부터 그렇게 해왔다는 관행이라는 이름의 절충이 압도한다. 이런 상황에서 남는 것은 일을 하려고 하는 명예직 위원회인가, 아니면 실제로 명예직의 명예만 누리는 위원회인가라는 차이일 뿐이다.
왜 있어야 하는가
만약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에서 하는 일들의 대부분이, 지방자치단체나 지방문화재단을 통해서 수행할 수 있는 성질의 것이라면 과연 한국문화예술위원회는 왜 있어야 하는가. 그저 보조사업에 대한 관리만 할 뿐이라면 구태여 위원회로 있을 이유는 뭔가, 오히려 하는 일에 맞춰 진흥원 구조가 더 타당한 것 아닌가. 새롭게 구성된 위원회의 모습은 자동적으로 이런 의문을 던진다. 정권이 바뀌면 그때그때 문화체육관광부가 정권의 코드에 맞춰서 적절하게 절충한 위원들로 선발될 뿐이라면, 그것이 인정되거나, 납득되거나, 체념되거나 한다면 그동안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위원회다움을 위해 시도했던 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라는 본질적인 질문이 남게 된다. 그러니까 현재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구성에 대한 침묵은 ‘그러면 그렇지’라는 확증의 강화다. 당연히 이건 현재 위원회에 한정된 것이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 블랙리스트 이후 위원회의 상황들을 포함해야 하는 문제다.
덧붙여 이 실패는 분명 어떤 부분에서는 우리의 실수와 겹쳐져 있고 또 그것이 제대로 짚어지지 않을 경우에는 반복할 것이 분명해 보인다는 것 역시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 너무 손쉽게 정권 탓을 하는 것은 어쩌면 각자가 져야 하는 먼지 같은 책임이라도 면책하려는 간편한 핑계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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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철.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문화연대 집행위원. '밥먹고 예술합시다'라는 집담회를 계기로 예술노동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예술인들의 공정한 보상과 문화산업 내 정당한 몫을 요구하는 모임인 예술인소셜유니온의 창립에 참여했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제1기 현장소통소위원회 위원으로 활동했으며 예술인금고의 전 단계인 예술인생활안정자금 관리위원회 위원이다. 현재는 문화/예술 재정과 예술활동과의 관계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연구하고 있다. 2022년에 '예술인의 사회적 지위와 가치에 대한 연구'(한국예술인복지재단)와 '동네 예술일자리 연결센터 실행방안 연구'(성북문화재단)의 책임연구를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