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애도를 통제하지 말라
영국 국립극단이 제작한 <워 호스>는 웨스트엔드에서의 장기 공연은 물론이고 여러 나라의 대도시 순회공연, 라이센스 공연 등으로 엄청난 수익을 올린 작품이다. 이 작품이 이렇게 큰 사랑을 받는 데에는 전쟁을 통과하고 있는 ‘말’과 ‘소년’의 우정에 대한 공감일 터인데, 섬세하고 정교한 말 인형과 인형의 연기가 이 작품에 대한 열광의 한가운데에 있다. 그러나 섬세함과 정교함만은 아니다. 배우와 인형, 인간과 사물이 만들어내는 '말' 연기는 표현 수단이나 스타일을 넘어 인간과 말이라는 서로 다른 존재의 교감을 그리는 드라마를 관통하며 죽고 죽이는 전쟁의 참혹함과 대비되는 순간들을 만들어낸다.
<워 호스>의 뛰어난 말 인형을 제작하고 인형을 조작한 단체는 핸드스프링퍼펫이다. 비록 <워 호스>는 우리 나라 무대에 직접 오지 못했지만, 공연료가 너무 비싸서 포기했다는 말이 떠돌았다, 이 단체의 인형과 연극에 대한 철학을 분명하게 보여주는 무대가 소개된 적이 있다. 2014년 4월 24일, 25일 국립극장 달오름극장에 오른 <한여름 밤의 꿈>이 그것이다.
당시 프로그램북에는 이 단체에 대한 소개글이 있었는데 그중 다음과 같은 문장이 있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철학은 모든 사물은 생명에 대한 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것이 살아 움직일 수 있는 힘이 있다고 믿습니다.”
이들의 이러한 철학은 <워 호스>의 정교한 말 인형과 연기보다 <한여름 밤의 꿈>에서 더 분명하게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일상의 사물들이 깨어나 움직이고 춤추고 인간들을 놀리면서, 셰익스피어의 환상적인 세계는 무대와 객석을 가득 채운다.
인형제작소에서 시작된 연극은 작업장에 있던 널빤지가 빽빽한 숲의 나무가 되고 여왕 티타니아의 명령을 따르는 요정들이 된다. 작업장 어느 구석엔가 있을 법한 낡은 주전자와 커다란 나무 숟가락과 포크는 오베론의 계획을 실행하는 장난꾸러기 요정 퍽이 되어 모였다 흩어지면서 변신한다. 셰익스피어가 써낸 요정들의 환상적인 세계는 사물의 본래 모습이 그대로 드러나는 인형들로 창조되고, 요정들의 세계, 인형들의 세계, 사물의 생명이 살아 있는 세계에서 인간들은 빗자루와 널빤지와 주전자와 포크의 장난에 속수무책이다.
배우들은 나무 판자를 들고뛰어다니고 아이들의 놀이처럼 낡은 주전자에게 말을 건다. 인형(사물)을 조정하는 배우들은 검은 어둠 속에 숨어 있지 않고 그대로 자신들을 드러낸다. 사물과 인간의 관계가 그대로 드러나는 것이다.
2014년 4월. 이 공연은 세월호 참사의 슬픔이 온 나라에 가득하던 때에 우리를 찾아왔다. 세월호 참사를 ‘애도’하기 위해 축제들, 공연들이 취소되던 때였고 국공립극장 프로그램인 이 공연 역시 국가의 정책에 따라 취소될지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찌어찌 공연의 막이 올랐다. 공연장에서는 노란 리본을 관객들에게 나눠주었다. 관객들은 그날 노란 리본을 가슴에 달고 공연을 보았다.
객석에서는 시시때때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셰익스피어의 희극이 아닌가. 그러나 그날 극장은 그저 떠들썩한 희극의 상연장인 것은 아니었다. “모든 사물은 생명에 대한 권리가 있다”고 믿는 그들의 공연은 버려진 나뭇조각에서도 생명을 '발견'하는, 불어넣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었다. 그날의 무대를 보며 객석의 우리 역시 그들의 신념을 믿게 되었다. 그들이 보여준 생명의 찬란함, 그 경이로움은 우리의 슬픔이 무엇인지를 다시 되돌아보게 한다. 세월호 참사의 한 복판에 있었던 ‘애도’의 순간이었다.
국가 애도기간 선포와 취소, 취소, 취소
오늘(30일)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공연을 보러 나오는 길에 공연 취소 문자를 받았다. 아무런 설명도 없었다. 스파프 홈페이지에도 아르코 홈페이지에도 공지를 찾아볼 수 없었다.
처음엔 공연팀에 코로나 확진자가 나온 줄 알았다. 공연 시작 한 시간 반 전 취소 문자에 이어 공연 시작 30분 전에 다시 안내 문자가 왔다. “10월 29일 발생한 이태원 참사로 인하여 국가 애도 기간이 선포됨에 따라 금일 공연이 취소되었음을 알려드립니다.” (30일 7시 아르코 홈페이지에는 서울국제공연예술제 세 편의 공연 취소 공지가 올라와 있고,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홈페이지에는 여전히 공지가 없다. 서울국제공연예술제 페이스북 페이지와 인스타그램에는 공지가 올랐다.)
애도를 위해 공연을 취소하고 축제를 취소한다면, 예매자들 개별 통보와 환불 공지에 분주할 것이 아니라, 널리 알려야 하는 것 아닌가. ‘함께’ 애도하자는 것이 취지라면 말이다. 더구나 그 취소가 과연 공연단체들과의 협의와 자발적 선택에 의한 것일까.
모든 축제와 행사를 취소한다, 국공립극장도 닫는다, 장기공연은 취소 없다 등등의 말들이 떠돌고 있다. 공식적인 발표는 없다는데 문체부의 방침인지 지침인지 축제, 행사, 공연들이 취소되고 있다. 국가가 주도 하는 ‘애도’가 얼마나 허둥지둥 진행되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직 사고 수습도 다 이루어지지 않았다. 사건도 다 밝혀지지 않았고 참사의 피해자들도 다 파악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 드러난 것만으로도 슬픔과 충격이지다. 그런데 지금 이렇게 허둥대며 먼저 해야 할 일이 취소, 취소, 취소인가.
페이스북에 들어오니 민간극장인데 자체적으로 공연을 취소한다는 공지가 있다. 또 어떤 공연은 애도의 뜻을 담아 예정된 공연이 진행된다는 공지도 있다.
축제를 즐기러 나온 젊은이들이 도심 한 복판에서 목숨을 잃었다. 우리 모두 슬픔에 빠져있다. ‘애도’를 위해 축제를, 공연을 취소할 수도 있다. 마찬가지로 ‘애도’를 담아 축제를, 공연을 진행할 수도 있다. 국가가 애도 기간을 선포하는 것, 이 안타까운 죽음 앞에서 슬픔을 함께 하자는 것에 동의한다. 그러나 국가가 ‘애도’의 모습을 정하고 강제하는 것은 반대한다. 슬픔의 크기가 압도적이라고 해서 모두 같은 모습인 것은 아니다. 도리어 국가가 이 슬픔을 함께 하자고 한다면 그 압도적인 슬픔의 크기만큼 더 여러 모습과 목소리의 애도가 필요하다. 축제를 만드는 사람도 축제에서 공연하는 사람도 축제의 관객들도 슬픔을 함께 하는 시민이다. 그리고 죽음 앞에서 삶 앞에서 절실한 것이 예술이다.
우리는 이 슬픔 앞에서 하고 싶은, 해야만 하는 애도의 말이 있다. 축제를 취소하고, 공연을 취소하는 것, 참여자들의 의사와 무관하게 국가가 지시하고 종용하는 것은 침묵의 강요와 다름 없다. 국가는 왜 무대를 닫아놓고 침묵을 강요하는가. 우리가 함께 모여 애도하는 것을 금지하는가.
‘애도’를 통제하지 말라.
참사로 목숨을 잃은 이들의 명복을 빕니다. 유가족들과 친우들의 슬픔에 함께 합니다. 참사 생존자들의 회복을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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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소연. [문화정책리뷰] 편집장.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 이사. 연극평론가. <컬처뉴스> <weekly@예술경영> 편집장을 지냈다. ‘커뮤니티와 아트’ ‘삼인삼색 연출노트’ ‘극작가리서치워크숍’ ‘검열백서위원회’ ‘광장극장 블랙텐트’ 등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연극비평의 대상으로 정책을 비평하는 연극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