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예술가들의 안내자 - 표신중을 추모하며
“실패 자체는 문제가 아니다. 실패의 원인을 가리고 원래의 목적을 실현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보다는 새로운 정책 아이템을 만드는 데에 골몰하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공공미술이 그렇게 흘러갔다. ‘문전성시(재래시장 활성화)’ 사업은 문화 영역을 떠났고, 문화예술교육 정책도 전과 같지 않을 것이다. 시류에 따라 문화정책에서도 문화복지가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대학원 전공을 예술경영에서 복지나 문화복지로 바꾼 눈치 빠른 공무원도 있을 정도다. 특별한 계기가 없다면 커뮤니티 아트도 흘러간 유행가 꼴이 될 가능성이 높다. 제대로 소개된 적도 없는데 말이다.” (표신중)
이 글은 2011년 경기문화재단에서 발간한 <커뮤니티와 아트> 주제비평에 실린 표신중의 "미국 커뮤니티 아트의 전개와 한국의 현실"에 실린 한 대목이다. 1997년 지자체 처음으로 설립된 경기문화재단은 서울을 둘러싸고 형성된 전통적인 농촌, 어촌 지역을 포함하여 급속한 산업화 도시화가 영향을 미치는 경기도를 사업대상으로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공공미술', '커뮤니티 아트','사회적 예술', '지역 공동체' 등에 관해서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당시 문화예술진흥실장을 지냈던 역사학자 윤한택의 증언에 따르면, 2000년대 초중반 표신중을 포함한 현장 중심의 문화기획자들이 경기문화재단에 입사하면서 이 분위기는 한층 더 고조되었다고 한다.
필자가 잠시 몸 담았던 2005년 경기문화재단의 분위기는 엄청 뜨거웠다. 나는 당시 재단 9층에 자리 잡고 있던 기전문화재단에서 교육기획전문위원으로 일했다. 기전문화대학의 학장을 맡았던 김보성은 '노래를 찾는 사람들' 출신으로 생활문화를 기반으로 한 대안교육, 도서관 등을 연결하며 인문학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성공회대학과 IMF 이후 늘어난 노숙인들을 위한 인문학 강좌 <성 프란시스 대학>을 시작했다. 이 프로그램은 <가난한 사람들의 인문학>을 확장하기 위해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했던 미국의 작가 얼 쇼리스를 참조한 것이다. 그해에 경기문화재단은 얼 쇼리스를 초청해서 강연과 세미나를 열고 그의 책 『희망의 인문학』을 출간했다. 어쩌다가 나는 이 사업을 담당하게 되었다. 성 프란시스 대학 프로그램에 재단 동료였던 고영직 문학평론가, 김종길 미술평론가가 강사로 참여하기도 하였으니, 재단은 지원사업을 설계하는 행정업무뿐 아니라, 현장에 동참해서 사회의 구체적 변화를 실천하는 동행자 역할을 했다.
재단 직원들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있기보다는 경기도 전역을 움직이면서 어떻게 하면 풀뿌리 문화기획의 토대를 만들지 동분서주했다. 내가 처음 표신중을 만났던 현장도 <창작촌 포럼>에서였다. 당시 경기도의 예술가들이 어떤 환경에서 창작하고 있는지 알 수 있는 자리였으며, 이와 같은 논의가 기초가 되어 대안공간이나 창작촌이 주도하는 레지던시 프로그램이나 안산의 선감도에 경기창작센터와 같은 레지던시 기관을 설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재단의 분위기가 이렇다보니, 2000년대 중반부터 확장된 사회적 변화를 주도하는 예술 활동이 경기도 지역을 중심으로 늘어나기 시작했다. 안양의 석수시장에서 시작한 스톤앤워터의 재래시장 프로젝트는 문화체육관광부의 <문전성시> 프로젝트와 같은 전국적 사업으로 확대되었고, 우리사회 곳곳의 소외계층이 존재하는 곳마다 예술가들의 사회참여 프로젝트들이 이어졌다. 그리고 손쉽게 이와 같은 프로젝트들을 ‘커뮤니티 아트’ 혹은 ‘공동체 예술’이라고 불렀다. 그런데 이 사업들은 빈부격차가 심하고 국가의 사회복지 제도가 서구 유럽 선진국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낙후되어 있는 우리 사회에서 드러나고 있는 사회적 불평등에 대한 예술(가)적 개입이 아니라, 소외계층을 대상화 하거나 관료주의적 행정관행에서 비롯된 것들이 많았다. 이런 다수의 사업에 내몰린 예술가들은 서서히 지쳐갔고 이를 대행해온 문화재단은 빠른 속도로 관료화 되었다. 내가 다시 경기문화재단에 입사해서 경기창작센터를 개관하고 경기도미술관을 거쳐서 문예지원팀에서 일하게 되었던 2013년은 이미 이 사태가 극에 다다랐을 때였다. 현장은 활력을 잃었고 나의 친구 작가들과 기획자들은 지쳐가고 있었다. 많은 기획자들은 더이상 재단에 지원 사업을 신청하지 않겠다고 하고 그저 그렇게 그들의 시간을 감내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현장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커뮤니티 아트’에 대한 비평적인 성찰이 필요했고 지원사업의 방향도 그에 맞추어서 재조정되어야 했다. 문제는 공동체를 기반으로 하는 ‘커뮤니티 아트’가 국내에서 창안된 것이 아니라, 이조차도 수입된 개념이라는 데에 있었다. 내가 공부했던 독일에서는 이와 같은 활동에 ‘문맥 속의 미술(Art in Context)’이라는 개념으로 부르거나 요셉 보이스 같은 작가가 말했던 ‘사회조각(Social sculpture)’, ‘사회적 연구활동으로서의 예술(Art as social research)’ 등으로 불렀다. 그만큼 예술이 사회와 만나는 접촉점이 다양하고 예술가의 상상력도 거기에서 나오기 때문에 이 새로운 예술영역에는 인문학, 교육, 정치 등 그동안 예술이 깊숙이 진입하지 못했던 영역의 전문가들과의 협업도 자연스럽게 생겨났다. 상황이 이러하다보니 제한된 상상력을 가진 국가 기관이나 문화행정은 이 활동을 제한하거나 관료적으로 디자인하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의 글에서도 드러나지만, 표신중은 미국의 커뮤니티 아트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를 친절하게 소개하고 있다. 그는 동시에 “한국의 커뮤니티 아트가 관료들에 의해 날 것 그대로 정책이 되고, 예산과 행정력에 의존해 사업이 추진되고, 평가가 내려지기도 전에 성공담으로 윤색되어 정치적 홍보거리가 되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공공미술과 커뮤니티 아트가 어떻게 ‘이식’되었는지에 대해 그 접촉면을 들여다보고 문제의 원인을 찾아내고자 했다.
2012년부터 경기문화재단은 ‘커뮤니티와 아트’ 콜로키움을 통해 커뮤니티 아트의 담론 생산을 위한 장을 마련하기 시작했는데, 현장 기획자들과 지원사업의 문제 등을 총망라해서 책으로 출판했고 여기에 표신중의 글이 실렸다. 재단은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라는 블로그 웹진도 운영했는데, 현장의 커뮤니티 아트 관련 필자들을 모아 경기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업들을 주목하고 이를 비평적으로 읽어내는 작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내가 문예지원팀으로 자리를 옮기고 커뮤니티 아트 관련 사업을 담당하면서 젊은 비평가들이 주축이 되어 똑똑 커뮤니티와 아트 블로그 웹진을 운영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 웹진에 수록된 글들을 모아서 2013년 이후 책으로 출간하기도 했다. 이에 재단은 공동체 기반의 예술 활동을 담론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각종 연구사업, 출판 사업, 번역 사업을 확대하였다. 어느 날 표신중 선생은 캐이트 나잇(Keith Knight, Lead Graphic Journalis)과 맷 슈바르츠만(Mat Schwarzman, Lead Author)이 쓴 『커뮤니티 아트 길라잡이』라는 책의 번역본을 들고 와 재단에서 출판을 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하셨다. 서구문화 전통에서 개념미술과 사회적 연구 활동으로서의 예술이 진화해서 형성된 ‘커뮤니티아트’와 한국의 ‘공동체 미술’은 사뭇 다른 양태를 띠고 있었는데, 표신중 선생은 이 책을 통해서 경기도 전역의 예술가들에게 ‘커뮤니티아트’의 새로운 지침서를 소개하고 싶었던 것이다. 다행히 두 필자가 기꺼운 마음으로 번역본을 내는 것을 허락해 주었고, 재단은 이 자료집은 제작하며 현장의 예술가들에게 보급하는 것은 물론, PDF파일 형태로 많은 예술가들이 참고 할 수 있도록 하였다. 돌이켜 보건데, 재단을 그만두고 한국문화정책연구소에서 정책연구자로 활동하시면서 경기문화재단에서 오랫동안 천착했던 ‘커뮤니티 아트’에 대해서 이론적으로 정리하고 현장에서의 혼선을 최소화하기 위한 선생의 고민에서 비롯된 제안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러니하게도 미술사의 여러 현장은 비평적 작업이 시작되면서 사라지거나 힘을 잃게 된다. 어쩌면 그 기운이 다해가는 무렵이 되어서야 비평적 조망이 이루어지는지도 모른다.
지난 4일 정동1928에서는 표신중 선생 유고집 출판기념회 ‘표신중을 다시 만나다’ 행사가 있었다. 표신중은 문화기획자로 노래모임 ‘석화’에서 활동하고, 극단 ‘한강’ <대결> 춤패 ‘불림’ <이 땅의 춤을 위하여> 연출하였으며, 경기문화재단의 문예지원팀장을 역임하고 (사)한국문화정책연구소에서 활동하다 지난 2019년 간암으로 타계했다. 이날 발간된 표신중의 유고집은 아내 박정원 이화여대 연구교수가 그의 글과 문화예술 현장에서 함께 했던 동료들의 글을 모아 엮은 것이다. 이 책에는 표신중이 마지막까지 천착했던 ‘커뮤니티 아트’, ‘문화예술교육’, ‘문화 민주주의 정책’, 그리고 ‘지역 축제’에 관련된 글이 실렸다. 나에게도 원고청탁이 와서 표신중의 커뮤니티 아트에 관한 글을 함께 실었다. 이 자리에 모인 사람들이 기억하는 표신중은 제각기 달랐다. 때문에 어떤 이들은 한국의 커뮤니티 아트를 재조명해 보려고 애썼던 표신중에 대한 나의 글과 발표에 대해서 동의하지 않았다. 한 개인의 삶을 추모한다는 것은 각자가 경험한 고인에 한정된다는 측면에서 매우 제한적이다. 하지만, 유족들의 노력으로 마련한 <표신중을 다시 만나다> 유고집 출판과 추모행사에서 지난 경기문화재단의 활동을 돌아보고 표신중 선배의 글을 다시 들춰보는 것은 지금 우리가 직면해 있는 문화예술 현장을 돌아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된다. 그는 공동체를 돌아보고 사회의 변화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줄 수 있는 예술 활동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했던 문화기획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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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영. 1996년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독일 뮌스터 쿤스트 아카데미에서 미디어아트를 전공하였다. 2003년부터 문화예술정책 개선을 위한 미술인회의,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소위원(시각예술, 다원예술)활동을 했고, 2009년부터 경기문화재단에서 문화예술교육, 경기도미술관과 경기창작센터에서 전시와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기획하였다. 2006년 기관을 벗어나 광주 의재창작스튜디오 레지던시 프로그램과 2007년 안산의 원곡동에서 커뮤니티 스페이스 리트머스를 설립하고 아시아교류 프로그램을 기획하기도 하였다. 최근에는 서울시립미술관 학예연구부장(2015)으로 일하다가 올해부터 북서울미술관 운영부장으로 일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