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판데믹 이후, 음악의 갈 길
코로나19는 공공의 장을 닫아버렸다. 유럽 국가들은 한동안 전국을 락다운 상태로 둘 수밖에 없었으며 한국 또한 ‘필수적이지 않은’ 곳들을 닫아버렸고 비대면 수업과 회의가 일상화되었다. 공연장은 그 무엇보다도 위험한 시설로 분류되어 시도 때도 없이 열고 닫기를 반복하고 있다. 많은 아티스트들이 이러한 조치를 감내했다. 사회의 안전을 위하여, 많은 공연이 취소됐다. 페스티벌은 취소되었고, 공연이 이루어지는 장소인 클럽, 펍, 카페 등은 휴업에 들어갔다. 공연계 전반의 매출은 1년 새에 75.3% 감소했다(인터파크 2020년 공연 시장 결산 기준).
이에 음악업계는 지난 1년간 다양한 활로를 모색했다. 독일에서 ‘리스타트19’라는 이름으로 연구를 진행한 마르틴루터 할레비텐베르크대 연구팀은 대형 공연장에서 관객들이 바이러스에 얼마나 노출되는지를 두고 실험으로서의 공연을 진행했다.(기사보기) 밴드 플레이밍 립스(The Flaming Lips)는 아예 관객과 연주자들을 대형 풍선에 들어가게 한 채 공연을 진행했다.(기사보기) 한국에서는 정부가 나서서 온라인 공연장 조성 및 제작지원에 265억원의 예산을 편성했다.(기사보기)
또한 음악인들은 음악 외적인 부분에서도 보완책을 모색했다. 록 그룹 오아시스의 보컬이었던 리암 갤러거는 판데믹으로 일자리를 잃은 공연음악 노동자들을 위해 크라우드 펀딩을 진행했다.(기사보기 ) 영국 맨체스터에서는 공연음악 관계자들이 정부의 지원을 촉구하는 가두 시위에 나섰다.(기사보기) 뉴 오더(New Order)와 더 큐어(The Cure)를 비롯한 유명 뮤지션들이 이들의 시위를 지지하고 나섰다.
결국 현재 대중음악산업의 자구책은 두 가지로 압축해서 구분할 수 있다. 전자는 기존 시장의 방식을 판데믹 상황에 적응시킬 수 있는가를 가늠하는 방식이고, 후자는 음악 노동의 의미를 되새기며 보호/유지를 촉구하는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전자는 대체로 시장의 논리에 기대고 있다.
공연음악의 현장이 거의 초토화 된 상황에서, 음악산업은 온라인으로 편중되기 시작했다. 2020년 한 해 미국에서는 전년도 대비 음원 스트리밍 서비스에 1,500만 명이 넘게 이용자가 증가했다.(기사보기 ) 한국의 상황도 마찬가지다.(기사보기 ) 이러한 꾸준한 성장세에 따라 한국에도 스포티파이가 런칭했다. 이러한 현상은 특별하지 않다. 기술의 발전은 필연적으로 스트리밍 서비스를 확산시킨다. 또한 음원의 단가도 점점 내려갔다. 가상악기로 만든 음원은 더이상 실제 녹음과 차이가 없다. 유명 아티스트들은 노트북을 가지고 다니며 투어 중에 음원을 빨리, 많이 만들 수 있다. 이러한 경향에 따라 전통적인 의미의 공연음악은 축소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판데믹이 겹치게 되어, 뮤지션들은 온라인에 머물렀다.
하지만 사실 스트리밍 서비스나 온라인 공연이 아티스트들에게는 철저히 불균등한 체계다. 스포티파이는 리스너의 개별 취향에 따라 적절한 플레이리스트를 구성해 준다는 매력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방식은 대체로 대중적으로 이미 알려진 ‘명반'들 위주로 구성된다. 스트리밍 서비스의 알고리즘은 리스너에게 실험을 시도하지 않는다. 예를들면 시어 맥(Sheer Mag)을 듣던 리스너도 결국은 랜덤으로 음악을 듣다 보면 AC/DC로 끝나게 되는 식이다. 온라인 공연이 모두에게 기회를 주는 것도 아니다. 유명한 아티스트들의 온라인 공연은 슈퍼챗을 통해 수익을 올리지만, 신진 아티스트는 조회수조차 뽑아내기 힘들다. 기존 공연음악 시스템은 신인들이 어느 정도 알려진 아티스트들의 서포트를 받아 이름을 알렸는데, 공연을 하지 못하니 아티스트간의 교류가 줄고 결국 ‘씬(Scene)’이라는 생태계가 붕괴했다. 공연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음악의 베타 테스터로서 위치를 부여하기도 했는데, 이 체계가 붕괴하자 음악 자체가 멈추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2020년 이후 사실상 ‘새로운' 음악이라 불릴만한 것은 없다.
이러다 보니 스트리밍 서비스는 탑티어에 위치한 뮤지션들의 잔치로 끝나게 된다.(기사보기 ) 스트리밍 서비스도 진부함을 막고 거대 음원 회사들에 대한 의존을 막기 위해 나름대로 개인들의 플레이리스트들 중 일부를 수집하여 새로운 음악을 발굴하고 있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 한대로 이것이 새로운 트렌드를 선도하지는 못하고 있다. 프로그램 알고리즘은 그다지 창의적이지 않다.
2020년도 이전까지는 이를 상쇄시켜 주는 것이 공연이었다. 비록 물리적인 상품(LP, CD) 시장이 붕괴하고, 음악 공연의 파이가 줄어들었어도, 국제여객운송의 단가가 낮아지고 독립적인 음악 투어의 서킷이 등장하면서, 잘 알려지지 않은 뮤지션들도 해외 투어가 가능해졌다. 이는 뜻하지 않은 곳에서 새로운 관객을 만나게 해 주었다. 이러한 아티스트들은 소위 말하는 탑 100 차트에 있지 않았고, 투어는 새로운 음악과 문화의 충돌을 불러왔다. 물론 공연 시장의 축소로 인해 흑자를 보는 아티스트는 매우 적었지만, 투어는 새로운 아티스트들에게 돌파구가 되었다.
판데믹 시대의 대중음악계는 스트리밍과 언택트 공연같은 ‘새로운 매체'로는 한계가 있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한국의 온라인 공연장 조성은 일견 관객과 아티스트의 거리를 줄여주는 것처럼 보이긴 하나 실제로는 관객과 프로덕션의 거리만을 줄여 줄 뿐이다.
알고리즘은 창의적이지 않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대중음악계에는 현장 위주의 법적, 정책적 대책이 필요하다. 앞서 이야기 했던 영국의 공연음악 산업계 시위는 이러한 맥락에서 나온 것이었다. 풀뿌리 음악의 현장이 죽고 거대 자본으로서의 프로덕션만이 남는 것이 옳은가? 적어도 이제까지의 역사적 사례를 보건대, 새로운 것은 언제나 변방에서 발생했고 신선한 시도는 기성 산업에서 탄생하지 않았다. 단순히 언택트 공연장을 신설하는 방식으로는 지금의 위기를 해결할 수 없다.
소규모 공연음악 시설은 합법도 불법도 아닌 상태다. 지난 1999년 라이브 클럽 합법화 이후, 일반음식점에서 공연이 가능하게 되긴 했으나 그렇다고 법적으로 명확히 지위를 획득하지는 않았다. 영국의 경우, 공연장의 형태가 어떠하든 공연 라이센스를 발급하여 관리하고 있다. 한국은 지금 전국의 공연 공간과 여기에서 활동하는 아티스트의 숫자를 명확히 집계한 바 없다. 한국은 이미 많은 아티스트들이 크고 작은 현장에서 활동하고 있는 국가고 이들을 일괄적으로 집계하고 보호할 제도적 근거가 필요하다.
음악의 현장을 다시 열기 위해, 보다 폭넓은 논의의 장 역시 필요하다. 독일의 ‘리스타트19’ 프로젝트는 연구 결과 충분한 환기 시설과 제한된 입장 인원을 유지한다면 팬데믹 하에서도 대규모 공연이 가능하다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한국의 경우 뮤지컬이나 클래식 공연과 달리 대중음악 공연은 여전히 모임/행사로 분류되어 100인 이상이 모일 수 없게 되어있다.(기사보기 ) 이 기준은 합리적으로 검증된 바도 없고 공개적으로 논의된 바도 없다. 오로지 관계 당국의 ‘명령 하달'만이 있었다.
아직 공연장에 사람들을 모으는 것이 섣부르다 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은 판데믹 상황에서 도서관과 학교를 닫아버렸지만 대기업이나 종교시설은 끝끝내 닫지 않았다. 대기업 사무실에 모여 일하던 십여 명의 사람들이 4명씩 각기 다른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야 하는 촌극이 지속되고 있다. 결국 “무엇을 지속하고 무엇을 중단할 것인가"의 기준이 매우 모호했던 것이다. 이에 대한 공론장이 필요하다. 전염병 관리는 전문가들의 연구에 따라야 하지만, 그의 실행에서는 정책의 역할이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문제에 대해 함께 말하고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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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희. 밴드 ‘리셋터즈’ 베이시스트. 밴드 ‘명령 27호’와 ‘파렴치악단’을 거쳤다. 활동가로서 ‘징병제 폐지를 위한 시민모임’ 서울지부에서 활동했으며 현재는 평화 활동가들의 모임 ‘전쟁없는 세상’의 병역거부팀에서 활동하고 있다. 최근에는 공연음악의 현장에 기반한 아티스트들과 관련자들이 모여 보다 실효성 있는 정책을 촉구하는 ‘공연음악 생존을 위한 연대모임’ 결성에 참여, 함께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