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연재_ 도시와 문화정책⑬] 코스모폴리턴 금촌金村
필자는 이름도 촌스러운 금촌사람이다. 금촌에서 태어났거나 금촌초등학교를 나온 것은 아니다. (지역에서는 그 지역명 붙은 학교를 나온 사람이 짱이다.) 하지만 금촌에서 8년째 살고 일하고 있다. 서른 즈음 어릴 적 살던 서울을 떠난 뒤론 가장 오래 머물고 있다. 금촌은 20세기 들어 3번 정도의 부침이 있었는데 첫 번째는 일제가 경의선 철로를 건설하면서 전형적인 시골이었던 이곳에 기차가 멈추어 가는 역사(驛舍)를 만든 것이다. 100년 전에도 역세권은 프리미엄이 있어서 이곳은 단숨에 주요한 거점으로 부각되었다. 원래 새로운 마을이란 뜻의 새말이었던 이름을 일본인이 ‘쇠말’로 알아들어 한자로 금촌이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한편으론 부를 상징하는 ‘금’을 붙여 그렇게 지었지않나 하는 생각도 해본다. 하여간 원래대로라면 신촌(新村), 20세기 초 뉴타운이라 불렸었을지도 모르는 곳이다.
파주는 서울과 개성의 중간에 위치하고 있어서 파주의 중심은 원래 더 북쪽인 문산지역이었다. 분단과 전쟁으로 문산은 휴전선을 바로 마주하고 있는 위험 지역이 되고 문산의 행정, 교육, 경제가 금촌으로 내려와서 이곳은 파주의 중심 역할을 하게 되었다. (‘문산제일고’가 금촌에 있다.) 파주는 90년대까지 모든 것이 제한된 군사도시였다. 금촌은 파중의 중심이라고는 하나 농촌의 작은 읍내 정도였고 주말이면 외출나온 군인들, 면회객들로 북적거리는 곳이었다.
90년대 중반 <금촌댁네 사람들>이라는 유명한 프로그램이 방영되었는데 이를 통해 금촌을 알게 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금촌댁’이라는 이름은 촌스러움과 변두리스러움, 서울과 구별되는 소지방 사람들을 떠올리게 한다. 전원일기가 시골 사람들의 순수함을 부각했다면 금촌댁네 사람들은 서울에 가지 못한 변두리 사람들의 욕망을 우스꽝스럽게 희화화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금촌이라는 이름은 전국적 유명세를 탔지만 시골 마을 금촌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그저 그런 변두리 중 하나였다.
지금 만일 주말에 금촌을 방문하게 된다면 가장 먼저 만나는 사람은 경운기를 몰고 수확을 나르는 농부나 외박 나온 군인이 아니다. 아시아 각국에서 온 낯선 얼굴의 이주민들이다. 이들은 전통시장에서 식재료와 생필품을 두 손 가득히 구입하고, 핸드폰 매점이나 금은방을 기웃거린다. 아이를 안고 가는 젊은 엄마들 서너 명의 대화는 주로 베트남어나 태국어이다. 파주 곳곳에서 온 이들은 택시의 주요 이용객들이다. 면적이 넓은 파주 구석구석에 살고있는 이주민들은 버스 시간을 맞추기 어렵거나 혹은 신분상의 두려움으로 인해 택시를 이용하는 경우가 많다. 이들은 현금거래를 많이 하고 자주 값싼 물건을 뭉텅이로 고국으로 보내기도 하기 때문에 금촌의 시장은 이들로 인해 호황이다. 금촌전통시장은 그래서 이미 ‘이주민 특성화 시장’으로 자리 매김하였다.
필자는 이곳에서 이주민들을 만나고 있다. 이들이 노동현장에서 겪는 어려움을 상담하고, 법률조언을 하며, 노동법 교육, 한국어교육을 실시한다. 재미있는 것은 우리 센터를 찾아오는 한국인들에게 금촌에 얼마나 외국인이 많은지 아냐고 물어보면 하나같이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정말 그렇게 많냐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 주에 돌아와서는 커다래진 눈으로 정말 외국인이 이렇게 많았는지 몰랐다고 한다. 여기서 선주민 한국인들이 이주민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주민의 존재는 이들에게 ‘시선 밖’ 존재 들이다. 버스를 타고 빨리 지나가면 아무리 많은 것을 보아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무수한 이주민이 자기를 스쳐가도 그들은 ‘존재 밖’ 사람들이기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것이다. 보기로 작정하고 나서야 그 존재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알게 된다. 이주민이란 여전히 우리에게 ‘존재 밖 존재’들이다.
지난 십여 년간 한국의 ‘다문화정책’이 빠르게 변화해왔다. 그러나 한국사회에서 다문화정책은 이름과는 달리 사실상 사회 내부에 들어온 이방인을 어떻게 문제 없이 처리할 것인가를 논하는 내부자 중심의 사회통합정책이었다. 여기서 이주민은 여전히 불온하고 통합되지 않은 위험인으로 여겨진다. 내부 통합은 젊은 한국인은 하지 않는 김장담그기나 다도와 같은 문화적 전유로 이뤄졌다. 한국인들에게 이주 노동자는 여전히 잠재적 ‘불법체류자’이며 결혼이주여성은 방송에 나오는 효부거나 남편 등쳐먹고 도망가는 악질적 매매혼의 극단적 모습으로 여겨지고 있다.
다문화사회는 한국인이 아오자이를 입어 본다거나 외국인이 김치를 담궈 보는 식의 표상적 단계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다문화사회는 문화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핵심은 그 사회의 가장 약자이자 제도의 바깥에 있는 이주민의 인권과 복지에 대한 문제이다. 사회에서 가장 약한 이들이 언어적 문화적 장애물을 넘어 불편 없이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사회가 이주민과 더불어 살아갈 수밖에 없는 미래 우리 사회의 척도가 될 것이다.
작년 일군의 청소년들과 청소년아시아학교라는 프로그램을 진행하였다. 그들과 함께 금촌 곳곳에 산재해 있는 이주민식당을 방문하였다. 이주민식당은 평소에는 이주민들의 아지트같은 역할을 한다. 이국적인 향료와 분위기, 음악이 가득하나 한국인들은 쉽게 발을 들여놓지 않는 곳이다. 이러한 식당이 금촌에만 10여 군데나 있다. 캄보디아, 파키스탄, 태국, 네팔 등등. 물론 이 역시 평소에는 한국인들에 눈에 전혀 보이지 않지만 말이다. 청소년들이 이주민 식당을 방문하여 낯선 음식들을 먹어 본 뒤, 맛과 분위기 가격을 종합하여 별점을 매기고 이를 종합하여 금촌 아시아식당 가이드북을 내었다. 이름하여 『금촌 아슐랭(아시아+미슐랭) 가이드북』이다. 가끔 청소년들이 이주노동자센터에 자원봉사를 하기 위해 방문한다. 10대 청소년들이 20~30대 이주민들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 있을까? 많지 않다. 우리 센터에서는 ‘만남’을 주선한다. 서로에 대한 편견 없이 배우는 만남이야말로 최고의 자원봉사일 것이다.
사람들은 이국적 분위기를 느끼기 위해 이태원이나 홍대에 있는 세련된 식당을 방문한다. 그러나 진정한 아시아식당은 이 세상의 변두리인 금촌에 있다. 오늘도 수많은 이주민들이 삶의 터전 삼아 일하며 왕래하는 곳, 그들과 함께 살아가는 농민, 시장상인, 군인, 택시운전사들이 바쁘게 살아가는 금촌이야말로 뉴욕이나 홍콩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코스모폴리턴 도시이다. 금촌이 세상의 중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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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민. 대한성공회사제. 파주이주노동자센터 샬롬의 집 소장. 전 외국인·이주노동운동협의회 운영위원장. 신학과 교육학을 전공했다. 18년째 이주민운동가로 살고 있으며 필리핀에서 귀환이주민의 정착과 통합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낯선 이들과 함께 살아가는 것을 운명처럼 여기고 살고 있다.